그 겨울의 소묘

그 겨울의 소묘 
   
   
   전용태 
   
   
   
   12월... 겨울은 벌써 꼬리를 드러냈는지 얼굴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그렇게 매섭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두르고 있는 목도리가 그저 장신구로 여겨질 만큼의 미지근한 공기.. 일찍 찿아온 강추위로 올해 겨울은 예년같지 않게 추울 거라는 한달인가 전의 일기예보가 지금은 우습게만 여겨질 뿐인... 그런 겨울. 12월의 하루다. 
   이렇게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아래로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바닥을 덮고 쌓인 눈이 뽀드득 신발에 밟히고 먹구름낀 쟂빛 하늘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두터운 옷깃을 여미는, 그러다가 문득 들은 시선 가득히 날리는 눈발에 옅은 미소를 띄우게 되는... 그런 날이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거리마다 늘어서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나 카드, 귓가를 맴돌다 스러지는 캐롤의 리듬들. 그것들이 올해는 유난히 낮설었다. 처음부터 거기에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던 때문이리라... 친구에게 ‘매리 크리스마스’라고 써진 카드를 보내던 몇 년 전에도 나는 단지 “오늘이 축제날이야.”라고 소리쳐대는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었을 뿐이었을 거다. 그래서다. 크리스마스 따위가 뭐야.. 라고 생각하게 된 올해에는 이 상관없는 축제를 떠들어대는 TV뉴스에도, 친구의 들뜬 몇마디에도 내 무심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그 크리스마스 트리는 연습장 표지의 여느 외국 그림만큼이나 낮선 풍경으로만 느껴진다. 
   나는 걷고. 
   
   조금 크게 빼액거린 문소리가 기척이 되었는지, 열려진 문 안 거실과 베란다가 그려진 회색빛 배경 사이로 작은 얼굴 하나가 빼꼼 내밀어졌다. 기울어진 그 웃음띈 표정 아래로는 검은빛 머릿결이 길게 늘어졌다가 구부러진다. 
   “어디 갔다 오는 거니?” 
   두른 앞치마까지를 문 사이로 드러내고 나서.. 영주는 그렇게 묻는다. 
   “왔구나.” 
   괜한 한마디를 무심하게 던져놓았을 뿐,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빤한 시선을 나는 그냥 지나쳤다.. 괜한 어리광이었던 걸까? 그녀를 애써 무시하고, 그러면서 또 그녀가 한마디 가벼운 농담을 던져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위로받고 싶을만큼 그렇게나 지쳐있었던 건지... 그런 스스로에게 얼마간 짜증이 나서 늦게서야 떠듬.. 한마디를 흘린다. 
   “그냥..” 
   그 다음엔 피식.. 헛웃음. 
   그런데... 
   어쩐 일인걸까..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오늘은 평일일 거였고 그녀는 지금쯤 회사에 있을 시간인게 아닌가? 날짜를 잘못 세고 있는 건가 해서, 주말연속극을 본게 몇일 전이었더라.. 하고 계산을 해 보기까지 했지만 오늘은 수요일이거나 목요일. 그렇지 않더라도 주말과는 거리가 멀을 거였다.. 12월. 하나 있는 공휴일인 크리스마스까지는 아직 조금이 남았고. 
   “직장은?” 
   내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그 대답 대신이었을 그녀의 장난스런 미소는 아마도 ‘알아맞춰봐.’ ..하고 말하고 있다. 
   “글쎄.. 쫒겨난거니? 어쩌면...” 
   ...언뜻 떠오른 허황한 생각들 중에 하나를 아무렇게나 잡아 던져 놓았을 뿐이다. 그녀의 재촉하는 눈빛에 대한 대답으로... 단지. 
   “아니. 지금 일하고 있는거야. 이게..” 하고, 그녀는 한손의 국자를 들어보인다. 
   그렇게 수수깨끼같은 한마디씩을 던지고 그때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재밌어 하는 거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다음을 꺼내놓았다. 그럭저럭 답이 생각났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모르겠어.’라든가 해서 어쨎든 이 유희를 끝내고 말았을 거다. 적어도 지금.. 그녀의 장난 하나하나마다에 맞장구를 쳐 줄 수 있을만큼의 여유까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원고 받으러 온거니?” 
   “헷. 맞췄네.” 
   그녀는 버릇대로 혀를 조금 내밀어 보이고 나서는.. 
   “부장님이 원고 받을 때까지 돌아오지 말래. 30분마다 연락하라고도 하던데... 너 놀러나갔다고 그러니까 좋아하더라.” 
   벌써 몇번이나 보았던 편집장의 그 노발대발 고함지르는 모습이 그녀의 말에 스쳐 떠올랐다. 다음, 그에게서 받아내야할 신경질과 잔소리가 충분히 상상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닥 신경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제풀에 지쳐 그만둘 때까지의 얼마간 표정을 굳히고 그의 흥분섞인 몸짓을 지켜봐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게 다다. 
   “상관없어..” 
   누구에겐지 모르게 그런 한마디를 중얼거려 보고는, 
   “그런데 이런 거.. 담당기자 일이잖아. 미애씨는 무슨 일이 있는거야?” 
   “미애 대신 내가 온게 실망스럽다는 말투네.” 
   나는 진지한척 점짓 표정을 굳혔다. 
   “당연하잖아. 너 설마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테지? 자기한테 미애씨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라도 있다고...” 
   ....그녀의 팔꿈치에 머리를 찍히고 말았다. 눈을 가린건 그녀의 셔츠였던가?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집 안으로 낮게 울린다. 나는 슈우우... 연기가 피어오르는 머리를 양 손으로 감싸쥔 채,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통증이 조금 가라앉고 나서, 눈물이 배어나온 시선을 들어 올린 거기에 그녀가 사악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래서... 미애씨는?” 
   되풀이한 머뭇거리는 질문 위로 그녀의 내던지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죽었어.” 
   
   책상 위로는 집을 나가던 아침 그대로의 잡동사니들이 어지럽게 늘어뜨러져 있다. 잉크병에서 흘러나와 얼룩을 그리며 넘어져 구르는 한자루 펜. 지우개, 겹쳐 누워있는 카터와 모양자, 쓰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자료들... 그 가운데 펼쳐져 있는 미완성의 원고뭉치만이 영주가 집어 봤었는지 원래보다 비뚤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눅눅한 오후의 햇살로 선명하게 뭉그러져 오히려 하나의 장식된 풍경처럼만 느껴진다. 그만큼 낮설어 보였고... 그래서였을 거다.. 나는 잠깐을 주춤거리고 나서야 그 앞의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러면서 내어질러진 삐액.. 하는 작은 마찰음에 영주의 낮은 한마디가 섞인다. 
   “출장갔을거야.. 아마.” 
   “응?”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 뱉은 두서없는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나는 그런 짧은 반문을 던졌다. 돌아본 그녀는 닫힌 방문에 기대어 서 있다. 떠올라 있는 옅은 미소로도 그 의도를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하고 문득 떠오른 하나의 생각으로 움찔.. 하던 입술은 그리고 멈췄다. 그녀가 환기하는 말을 덧붙이는 쪽이 보다 빨랐던 거다. 
   “미애 말이야.” 
   나는 “아.. 그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어서 피식..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네. 죽은게 아니라서..” 
   다음으로 잠깐 그녀의 잠긴 눈동자에 시선을 두었다가는.. 그리곤 몸을 돌려 책상 위의 원고를 집어든다. 더 꺼내 놓을 말이 있지도 않았고, 그녀도 별 달라보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면서 얼핏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필요이상으로 거듭한 질문이 농담을 농담같지 않게 만들어서 그녀에게 어떤 오해를 안겨준 건 아닐까? 그래서 별 의미없이 던진 하나의 질문을 그녀는 오히려 지나치게 의식해서 반응하고, 내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잊어버린 그 다음까지도 되뇌이고 있다가 대답을 꺼내놓은 것은 아닐까? 나는 어쩌면 시험당한 건가? 그녀는 사실은 ‘너 정말 미애한테 관심있는거니?’라고 묻고싶었던게 아닐까? 나는 그 대답에 대한 반응으로 관찰되어지고... 결국은 그녀의 의문에 대한 어떤 해답이 결론지어진건가? 내 반응이 단순하지 않았다면 던져지는 조건은 따라서 다양해지고 심문은 보다 더 길게 이어졌을까? 그런건가? ....어쩌면... 
   그런 생각 때문은 아니다. 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장황한 ‘어쩌면’이 아닐 경우를 생각하니 그랬다. 
   
   원고는.... 당연하게도 마지막으로 손을 댔던 그제 밤의 그대로다. 펜선까지가 덧씌워져서 나름대로 정리된 그림들은 거의가 완성되어 있다고 해도 사실 좋다. 약간의 톤(tone) 작업과 마무리가 거기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를 끝내기에는 이제부터 반나절의 시간도 모자라지는 않다. 그런 만큼, 마음만 먹었다면 이 원고를 완성하는 것은 어제의 새벽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은건 마지막을 뒤로 미루는 게으름 때문은 아니었다. 
   “수아.. 때문인거야? 또...” 원고를 넘겨보는 뒤에서 영주가 묻는다. 
   그래.. 라고. 그런 침묵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됬을 거다. 
   “잡지사가 만만해 보여서인 때문인 것도 있겠지? 마감 좀 어겨도 어떻게 넘어가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사소한 이유로도 매달 마감날짜를 넘길 수 있는 거지?” 
   “하하.. 그렇기도 하구.” 
   그녀의 몰아새우는 말에 나는 곤혹스런 웃음을 내어 뱉었다. 
   원고를 한 장씩 넘기는 손길은 잠깐씩 자주 멈춰 선다... 그렇게 원고를 대충 훑던 시선은 하나의 컷에 멈추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한 여자아이의 깊은 눈빛마다에 묶였다가.. 흐트러지는 거다. 
   .....어떤 종류의 실력부족과 조금 특별한 우연이 거기에 작용했을거다. 그렇게 잘못 그려진 하나의 캐릭터가 ‘수아’다. 
   마음 속의 이미지 그대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이 완벽할 수는 없다. 설정대로의 성격과 분위기를 인물에 담아내는 일은 원래 쉽지 않고, 거기에 실패한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망쳐진 그림은 단지 ‘미흡할’ 뿐이고 마는 거다. 거칠고 굳은.. 그 다듬어지지 않은 개성으로, 그것이 실패작 이상의 무엇일 수는 없었다. 
   수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비슷한 잘못이 표현하려는 캐릭터를 흐려놓은 다음에... 거기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하나의 다른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었던 거다. 눈, 코, 이마, 입술, 얼굴선, 눈썹... 어느 부분의 작은 차이와 일그러진 조화가 그런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알 수 없다. 캐릭터를 싸고 있는 그 미묘한 분위기는 일부러였다면... 죽어도 그려내지 못했을 거다. 펜을 쥔 손을 떨구고, 나는... 아주 한참 동안이나 그 한 장의 그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우연히 잘못 그려진, 희미한 웃음을 짓고있는 작은 여자아이가 지독하게 마음에 들었다. 시간에 쫒기던 방금 전까지의 조급한 기분도 잊어버리고서, 나는 그녀의 여러 표정과 포즈들을 그려보는데 정신이 팔렸다. 그리고.... 
   어째서 그녀를 다른 캐릭터로 남겨두고 수아라는 인물을 새로 그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다음 연재물의 주인공이라거나, 아니.. 전쟁 후의 폐허에 쓰러져 죽어있는 수백명 시체 중의 하나로라도 그녀는 좋았다. 단지 그녀는 수아가 아니어야 했을 거다... ‘검은 피부의 미소녀’라는 최소한의 설정대로 그녀의 얼굴을 스크린톤으로 잔뜩 씌워 ‘수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난 후에, 그녀는 흙탕물로라도 더럽혀진 것 같았다. 그 결과로 완성된 갈색 살결의 건강한 여자아이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긴 하지만... 그녀는 내가 반했던 그 여자아이는 아닌 거다. 
   그런게 매번 마감을 넘기는 사소한 이유다. 수아의 드러난 피부마다에 톤(tone)을 붙이고, 붙이고, 붙이고... 그렇게 좋아하는 하나의 캐릭터를 망가뜨리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유예(猶豫)하는... 그런 때문이었다. 
   음. 그런 따위의 이유라니... 결국 잡지사가 만만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인 건가? 
   
   영주는 밤 늦게서야 원고를 받아 회사로 돌아갔다. 나는 따라 집을 나와서는 깜깜해진 골목과 찻길을 함께 걸었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녀를 태워 보낸 다음, 차가 한참 멀어지는 것 까지를 지켜보고서야 몸을 돌린다. 문을 닫으며... 그 반쯤 열려진 창문 너머로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흘렸었던가? 차잡게 식은 점점의 어둠이 내어놓은 손 등에 달라붙고 있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칙칙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정집들이 늘어선 사이의 좁은 골목을 지나면서였을 거다. 그녀가 내쪽을 향해 돌린 얼굴이 가로등 빛으로만 흐리게 비췄다. 창백한 불빛에 젖은 가는 입술은 꿈틀거리며 그런 말들을 뱉어놓았던 것 같다. 걷는 동안 내내에 주고받았던 얼마 안되는 몇마디중의 하나니까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어쩔거야?”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어쩌면 그녀는 다음의 대답을 대충 예상하고 있었을 거다. 단지 내 반응을 확인하고 또 그 다음의 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그렇게 꺼내어진 화두(話頭)였을 뿐이리라, 그 하나의 질문은. 나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해진대로의 대답을 흘렸다... 그랬었을 거다. 기억하고 있다. 
   “특별한 게획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구. 여느 공휴일처럼 지내겠지... 더도 덜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라는게 내게는 그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나 그 다음날을 집구석에 혼자 처박혀 지내더라도 전혀 쓸쓸해 한다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야.”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차 올랐다. 
   “진우하고 몇 명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거라는데... 가 볼 생각은 없는 거니? 굳이 무슨 의미를 두는게 아니더라도... 그래. 니 말대로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단지 공휴일일 뿐인 거라고 하더라도, 궁상맞게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것 보다는 그게 낮잖아.” 
   “아니... 단지 크리스마스의 이름을 빌릴 뿐인 파티인 거라면 거기에 어울릴 수도 있고 생각없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몇번 되뇌어 줄 수도 있겠지만, 진우들이라면 그게 아니잖아... 계네들한테 크리스마스는 진짜 축제인 건데... 거기에 끼어봤자 스스로를 소외시킬 수 있을 뿐이겠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려 보인다. 다음으로 낮은 한숨을 토해내면서, 
   “...고집센 어린애를 설득하는 기분이야.” 
   그녀의 그런 말에 또 뭐라고 반박해서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일부러 이 지겨운 화제를 조금 빗겼다. 
   “너는 어떻게 보낼건데? 그 대단한 크리스마스...” 
   그 다음의.. 깜깜한 골목길을 걸어가는 잠깐동안을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꺼내 놓지 않았다. 조금 숙여진 눈길은 두껍께 깔린 어둠 속의 어딘가를 의미없이 응시하고 있다. 
   “태우오빠하고의 멋진 데이트..” 
   흘러나온, 그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느낌의 말들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그러면서 쳐든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을 둘이서만 보낼거야... 부럽지?” 
   나는 피식.. 헛웃음을 흘린다. “그래..” ..라고. 그런 대답은 그리고 허공에 흩어지고만 말은 것 같다. 그녀의 쾌활한 척 하던 눈빛은 방금 전과 다르게 깊게 잠겨서 내 대답을 무심히 스쳐 보낼 뿐이었다. 비추는 불빛이 그 눈동자에 아우성치며 가라앉는다. 
   몇 십 걸음을 그렇게나 묵묵히 걸어낸 다음이었을까... 
   “하지만... 그런 약속 취소하고 말까?” 
   응? 
   “친구중에 크리스마스를 혼자서 보내야만 되는 불쌍한 녀석이 있으니까... 나라도 같이 지내주지 않으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아서.. 그러니 태우오빠와의 그런 약속... 할 수 없지만 취소해 버릴까...” 
   나는 영주의 옆얼굴로 어처구니 없어하는 시선을 돌렸다. 걸음을 멈춰 서서는,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향해 분명한 한마디씩을 던진다. 
   “나는 크리스마스 따위 어떻게 되든 좋다고 했잖아. 몇번이나 말했지만 나 불쌍하다거나 하지 않아.... 절대로.” 
   그녀는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한순간 격한 감정이 떠올랐다가 스러지고, 무슨 말인가를 뱉으려던 입술은 조금 벌어지다 말았다... 영주는 그 입술 가장자리를 지긋이 베어 문다. 
   나는 굳었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래. 니 일이니까 니가 알아서 해... 하지만 나라면 절대 그런 걸로 망설이지는 않겠어. 친구 따위랑 여느 공휴일과 다를 바 없는 의미없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애인과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포기하겠다는 그런 거 말이야.” 
   기억하고 있다... 
   차 문을 잡아 닫으며 그 너머로 흘렸던... 그녀의 흐린 한마디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랬을지도 모른다. 
   좋아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몸을 수그리고도, 그녀의 표정은 그림자에 가려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그 한마디의 어감이 생각나지 않는다. 피어오른 하얀 입김은 부서지고만 말았다. 
   
   때르릉거리는 자명종 소리에 깨어 일어나보니 영주가 와 있었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는 방문소리에 몸을 돌려 내쪽을 쳐다본다. 한쪽의 가스랜지 위에서는 냄비들이 끓는 소리를 내고 있다. 
   “밤 9시에 일어나는 건데도 알람이 필요하니?” 
   그녀의 놀리는 말에, 나는 하품을 하느라 조금 늦은 변명을 던졌다.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거야.” 
   자고 일어난 후의 그 마른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지저분한 얼굴이며 부시시한 머리를 오래 보이고 싶지가 않아서 바로 욕실을 찾아 들어갔다. 한 손으론 졸린 눈을 비비면서 수도꼭지를 잡아 튼다. 요란하게 쏟아 내리는 물줄기 사이로 그녀의 높게 지른 목소리가 끼었다. 
   “식사 준비할 거니까 금방 나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는데는 몇 십분 쯤이 걸렸을 거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욕실을 나왔을 때, 식탁에는 제법 그럴듯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나는 조금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렇게 대단한 식탁이라니...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거야?” 
   그녀의 황당한 표정은 아마도 내 그 말 때문이었을 거다. 한참동안이나 내쪽을 쳐다보고만 있더니 설마 아니겠지.. 하는 투로 한마디씩을 물었다. 
   “모르는거야? 오늘... 며칠인지...” 
   음... 한달에 한 번 있는 잡지 마감날부터 한 10일 정도가 지났을 거였다. 오늘 날짜를 추리할 수 있는 단서들을 끌어모아 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잠깐을 생각하다가 자신없는 대답을 대충 꺼내놨다. 
   “글쎄.. 20일이 좀 넘었나?” 
   “아아... 24일이야.” 
   그녀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재미있다. 조금 웃었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다음의 말을 받았다. 
   “크리스마스 이브구나.. 뭐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요 며칠 일에 쫒기느라고 날짜 가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어. 그리고 크리스마스 따위 처음부터 아무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말했잖아.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 게다가 나... 의외의 일거리가 생겨서 오늘은 바쁘단 말이야.” 
   영주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조금 과장된 그 얼굴도 재미있었지만 이번에는 두들겨 맞기라도 할까봐 웃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왔는데 일이나 해야 되겠다는 거니?” 
   “할 수 없잖아. 니 마음대로 결정한 거니까... 그런 걸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녀를 조금 더 놀려주고 싶어서 점짓 퉁명스런 어투의 말을 흘렸다. 그녀는 주섬주섬.. 싱크대 쪽으로 가더니 제일 무식해 보이는 식칼을 골라 집어든다. 그것을 내 가슴에 겨누는 동안의 발끈한 표정에 묘한 미소가 겹쳤다. 
   힉--------- 
   “성의를 그렇게 무시하고 말아도 좋은거야? 기대하던 데이트를 포기한 것도 하나있는 친구녀석이 외로워 하지나 않을까 싶어서였어. 약속을 취소하느라 태우오빠를 얼마나 달래야 했는지 알아? 하는 수 없지..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을 응징하는 데에는 산타 할아버지도 이의가 없을 거야.” 
   칼 끝이 형광등 빛을 부시며 눈 앞으로 흔들거렸다. 나는 질린 척 뒤로 물러서며 다급하게 그녀의 말을 자른다. 
   “아아... 그래. 갑자기 생각났는데 오늘 하루 정도는 놀아도 상관없을 것 같아. 내일부터도 열심히 그리면 마감에는 어떻게든 맞출 수 있겠지.” 
   “....풋.”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곤 작게 고소를 터트렸다...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녀는 텔레비젼을 틀어놓고 거실 쇼파에 앉았다.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보다도 더 낮게 어느 가수인가의 의미없는 한 구절 노랫소리가 바닥에 흘렸다. 그 위로 내려앉은 형광등 불빛이 따뜻하다. 
   나는 그릇들을 대충 행궈 챙겨 놓고는 마지막으로 손을 씻었다.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몇 개 꺼내 영주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 참.” 
   손벽을 치더니 그녀는 뭐를 꺼내려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런 다음.. 탁자 위에 놓여진 건 귀여운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헝겁 인형. 그 위로 부딧친 맥주 캔끼리가 가볍게 짤그랑거린다. 
   “매리 크리스마스.” 
   라고... 
   “그래.. 12월 세번째 일요일 즐겁게 보내..” 
   내 말에, 삼키던 맥주가 목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그녀는 몸을 수그리곤 캑캑.. 낮은 비명을 토해낸다. 그러는게 괜찮아지고 나서야 또 한참동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졌어.” 
   깊어진 밤이 새벽으로 되는 동안 그녀는 평소같지 않게 술을 많이도 마셨다. 빈 캔이 쌓여가는 동안 그녀는 참 많이도 웃었고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러는 것이 내게는 과장스러워 보인다. 어느 한 순간 그녀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나중에는 그러는 것도 잊고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간... 후.. 하고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해 움직이지 않는 베란다 너머에는 보이는 아무 것도 있지 않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무슨 일 있는 거니?” 하고 물어주었다. 
   “나... 결혼할까?” 
   그녀의 뱉어 놓은 말이 조금 의외라서 나는 놀랐던 것 같다. 
   “그냥.. 태우오빠한테 그런 말을 들었어. 하지만... 모르겠는걸... 어쩌면 좋을지.” 
   탁자 위로 팔짱을 끼고 거기에 얼굴을 괴더니 그녀는 그대로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쓰레기들을 치우고, 방에서 이불을 가져나와 업드린 그녀의 등 위로 덮어주었다. 작업실로 가서 그림을 그렸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겨울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나 봤다. 무심히 움직이던 시선이 2월까지가 넘겨진 달력을 발견해내는... 그런 데에도 나는 문득 놀라곤 한다. 창 밖으로 몰아치는 바람은 여전히 차고, 거기에 가끔 눈발이 흩날리는 것도 아직까지는 당연하지만... 이 겨울이 가고 있다. 
   마감에 시달리느라 지친 머리는 자명종이 울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그것을 지각해 냈을 거다. 그렇게 잠을 깨고 나서도 잠깐동안을 이불 속에서 미적거리기만 하다가.. 나는 마음을 먹고 몸을 일으킨다. 잡자사에 3월분 원고를 넘겨준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24시간이건, 그 이상이건 자지는 만큼 자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늘은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팬 몇 명인가의 방문을 받아들이기로 몇일전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이 그 날이었다. 별로 내키는 일이 아니었지만 몇번이나 되풀이하는 그 부탁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하고 승낙해버리고 말았던 거다. 
   옷을 갈아입는 등의 준비를 대충 끝내고나니 약속시간이 거의 됐다.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사이에 삐잇...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은 거기에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꾸벅.. 허리까지를 숙여보이는 두명의 그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와... 집이 굉장히 넓네요. 상상하고 있던 거랑은 틀려요.“ 
   “혼자 사는 건가요?” 
   “작업은 어디서 하는 거에요?” 
   일일이 대꾸하기도 힘들 정도로 두 여자아이의 흥분거리는 그치지 않고 넘쳤다. 그녀들에게 집안을 안내하고, 원화들을 보여주고,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답하는 동안.. 나는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좋아하는 만화가라고 추켜세워지고 두 여자아이의 재잘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게 나름대로 재미있어서, 그러는 동안 몇 시간이 지나갔나 봤다. 
   “이 여자아이 수아... 죠? ‘Dragons' Generation' 의.” 
   작업실 한 구석, 액자에 끼워 걸어놓은 수채물감으로 채색한 하나의 원화를 가르키며 그중의 하나가 물었다. 
   “.... 그래.” 조금 주저한 대답 다음으로 예상했던 질문이 돌아온다. 
   “하지만 피부색이 다른데요. 원래는 짙은 갈색이잖아요... 그녀는.” 
   그려져있는 수아의 얼굴과..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팔 등은 그렇게 옅은 살색으로 칠해져있다. 숲 너머의 성을 바라보고있는 그런 구도의 그림이었다. 심심할 때 그려보았다가는 그녀의 표정이며 그림의 분위기가 맘에 들어서 칼라링(Coloring)까지 해 놓았던 거다. 
   뭐라고 설명을 하면 좋을까..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잘됐다고 수화기를 들어보니 영주였다. 
   “잠깐만 기다려줘... 전화를 받을 동안.” 그렇게 두명을 방안에 남겨두고 수화기를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누가 와 있는 거니? 
   “그래... 그냥.” 
   그렇게 대충 대답하고는 그녀가 더 캐묻지 못하도록 얼른 화재를 돌렸다. 
   “무슨 일인거야?” 
   -이때쯤 일어났나 싶어서... 그냥 걸어봤어. 
   “실없긴. 너 요즘 바쁠 거잖아. 결혼 준비는.. 어떻게 잘 되고 있는 거니?” 
   -...모르겠어. 
   조금 지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귓가로 흐른다. 그런 다음으로는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내쪽에서라도 대단찮은 신변잡기를 꺼내거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지금 나, 웨딩숍에 있다. ...태우오빠하고 함께야. 
   “웨딩드레스 맞추는 거니?” 
   -응. 많이 피곤해... 오늘 하루종일 돌아다녔거든. 
   그러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어리광이 섞인 것도 같다. 
   “결혼식 날짜는 정해진거야?” 
   -응. 3월 19일이야. 청첩장 보냈는데.. 못 받았니? 
   그녀의 짧은 말들마다에 섞인 그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들을 뭐라는 한마디로 정해 표현하기는 힘들다. 단지 그것은 어떤 느낌으로 되서 나에게 하나의 실감을 안겨주었다. 절대로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녀는 결혼하는 거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린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상상하는 것이 그렇게나 재미있었다. 
   “그래. ...손님이 기다리고 있거든.. 그만 끊자. 있다가 내가 전화할게.” 
   -응.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그해 겨울의 끝에 내 주위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두명의 대통령이 재판을 받았고 은퇴하는 어떤 가수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다는 여자아이도 있었다. 친구 한명이 결혼을 했고, 버스요금이 얼마인가 올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별 변한게 없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고, ‘은하영웅전설’ 게임을 여전히 즐겼다. 잡지에는 꾸준히 연재물을 싣고 있었다. 등장하는 미소녀들 중의 하나를 죽인 일로 항의편지를 몇 통인가 받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작품의 인기순위가 떨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