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애정 
   
   
   전용태 
   
   
   
   감정? 그냥 그랬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을, 아니 모르겠는... 그래. 뭐라고 확실히 할 수 없는, 그런 기분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아무렇지 않다라는 것이 같지는 않을텐데, 그냥 ‘됐어’ 하고 만다. 
   복잡하게 섞인 흐트러진 생각 한줄한줄마다를 끄집어내서 이름붙이고, 설명하고, 차곡차곡 분류해 내는 그런 것들이 지금은 버겁다. 생각도 몸도 길게 늘어진 피곤에 덮여서, 집으로 돌아가야지 몸을 뉘여야지 하는 하나의 바램에 매달려있는 것만으로, 힘이 부친다. 
   사방으로 넓게 트인 길, 그 한복판에 서서 나는 잠깐 망설인다. 저쪽으로 쭈----욱 올라가면 돼요. 한참 가다 보면 고개길이 나오구요, 교차로가 나오구요, 그다음이 신촌이에요. 하고 얻어들었던, 내가 쭈욱 올라가야 할 그 길이란 도대체 어디인걸까. 길게 뻗은 네가닥 길, 그 어느쪽 끝에도 낮익은 풍경 하나가 보이질 않는다. 혹은, 나는 이미 제대로 된 길을 지나쳐왔나. 그래서 여기는 그냥 사거리고, 그 뿐, 어느쪽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가야할 곳에서 점점 멀어질 뿐인건 아닌지. 막막하다. 
   내가 걸어온 방향을 가늠하고, 머릿속에 그린 지도 위로 명지대와 신촌이 어떻게 붙어있는건지 떠올리고, 아까 이 낮선 동네로 들어올 때의 택시바깥 풍경이 어땠었는지를 되집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애써도 그럴듯한 잣대 하나를 만들어내지 못하겠다. 결국 아무 길이나를 근거없이 고르고, 조금 걷다보면 도로표지판이 있겠지, 길을 물어볼 사람을 한명 지나치게라도 되겠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걷다가, 점점 더 낮설게만 변해가는 주위의 경치를 의심하면서도 한참이나 견디다가, 이 길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다시 돌아갈까, 결국 멈춰 선다. 그랬을 때였다. 빼곡하게 늘어진 나무줄기들 뒤켠으로 끝조각이 비죽 내밀어진 표지판 하나가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곧게 그어진 화살표, 연희IC, 양화대교. 낮익은 지명이 눈에 박히고, 나를 안심시켰을 때, 알콜중독, 감색 셔츠, 담배냄새.. 문득 그런 단어들의 나열이 머리 한 구석을 스쳐 흘러갔다. 용케도 틀린 길을 잘 피해서 왔구나, 얼마를 더 걸으면 눈에 익은 장소가 나오게 될까, 집에는 언제나 도착할까, 누나가 깔아놨을 두꺼운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가 누우면 몸이 싸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겠지, 그런 몇줄기 상념들이 부딪치며 맴도는 사이의 한 구석, 작은 틈새를. 스쳤다. 
   나는 감색이 어떤 색인지 사실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은 감색 셔츠를 너무 좋아해. 다른 셔츠가 몇벌이나 있는데도 꼭 지저분해진 그 옷을 입고 나가곤 한다니까, 했었던 그녀의 말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지금 우연히 그 단어를 떠오르게 했던 그런 걸거다. 그녀는 그리고 또........ 
   생각을 멈추고 주머니를 뒤진다. 크기가 제각각인 동전 몇 개, 그리고 쭈글쭈글하게 구겨져 접힌 담배갑이 손에 쥐어졌다. 손가락 사이에 눌리는 감촉으로는 남은 담배가 두개피쯤, 그리고 라이터는? 그녀의 방 책상 위에 놓아둔 채로 그냥 나왔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방을 열어 여분의 라이터가 없는걸 확인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조금 더 조급해진다. 
   너, 지영이는 봤었니? 종로였던가, 퇴근하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었거든. 아이를 안고 있는데, 조금 살찐게 그래도 옛날보다 예뻐보이더라. 며칠전에 어떤 남자가 옆집으로 이사를 왔어. 덩치가 괴물처럼 우악스럽고 얼굴도 험악하게 생겨서 깜짝 놀랐었는데 알고보니까 레슬링 선수인가봐. 텔레비전에도 몇 번 나왔었다는데 나는 못봤었거든. 그녀는 베란다로 연결된 통유리문에 붙어서서 그 바깥으로 졸린 눈빛을 향한 채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특별한 연결고리도 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게 너무 뚜렷해서 탈이야, 그렇게 감색 셔츠 얘기가 꺼내졌던 건 바로 그 다음이었을 거다. 그 또한 그녀 일상에 대한 소소한 감상중의 하나일 뿐인 거겠지, 하고 있는데, 그녀의 시종 시큰둥하던 표정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녀 한껏 찌푸린 미간 아래로 화장에 번져 배어드는 눈물을 눌러 닦아주면서, 내가 어떤 기분이었냐면, 대충 민숭했다. 그냥 적당히 불쌍하고 답답해하는 그런 정도. 그녀의 가라앉은 어깨를 잠깐 다독여 줬던 것도, 이런 상황에서는 이래야 하는 거겠지 하는 의례적인 계산 탓이 컸을 거다. 아니라면, 모르겠다. 
   멀리에 커다란 굴구멍이 보여서, 연희교차론가보다 하고 다가갔더니 그건 그냥 평범한 육교였고 그 옆에 띄엄띄엄 늘어선 건물들도 뒤에서 볼때와는 달리 전혀 엉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많이 혼란스러워한다. 아까 지나쳤던 찻길건너 건물은 서대문 구청이 아니었었나, 그 옆으로 나 있던 큰 터널이며가 전에 버스로 몇 번 지나치며 봤던 길인 것도 같았고, 그래서, 이 앞으로 얼마쯤 가면 모래내로 빠지는 길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을 지나치면 동교동길로 들어설 수 있겠구나,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던 건데, 이제는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게 돼버렸다. 
   길을 가르쳐주던 내 또래쯤의 남자아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려구요? 길이 있기야 있지만, 아주 오래걸릴텐데요. 그리고 ‘아주’를 되풀이 강조하긴 했었는데, 그렇더라도 납득하지 못하겠다. 연희동과 신촌은 바로 붙어있는 동네일 텐데, 그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끝부분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나는 벌써 두시간이나를 넘게 걷고 있다. 광화문까지라도 닿았을 듯한 그 긴 시간동안 어째서 나는 이 좁은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집이 많기도 하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의 내내, 길은 지치지도 않고 이어지고 크고 작은 간판들이 그 주위를 늘어서서, 끊이질 않는다. 그만큼의 사람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거겠지 생각하고, 나는 조금 어지러워졌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을 가진다는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텐데도,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느낌은 서울의 인구가 몇천만명이에요하고 숫자를 읽어내려갈 때보다 한결 직접적인 것이었고, 그것을 어쩌면 나는, 새삼 서러워한다. 그건... 늘 보던 드라마의 등장 인물이 불쑥 텔레비전 밖으로 몸을 잡아빼고 나와서는 코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저는 정말 대발이 아버집니다, 할 때의 그것과 비슷한 기분이 아닐지. 그리고는 팔을 뻗어 늘어진 손가락 끝으로 비어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이번엔 당신 차례에요. 
   그녀의 흐린 눈망울에 담겼던 쓸쓸한 자조의 빛깔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누군가의 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이렇게나 쉬운 세상이니. 그걸 알면서도, 또 그렇게 무엇엔가에 매달리고 싶어하나. 
   고개를 돌린다. 일초의 반의 반을 머무르지 않고 스쳐 달려가는 차들을 본다. 티에이엑스아이라고 노란 등이 켜져있는 파란 줄무늬 택시들 중의 하나, 그 뒷자석에 몸을 묻은 여자아이가 막 하품을 토해놓는 참이었다. 
   여자아이는 뒷머리를 한줄로 묶어서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남자친구가 좋아해서 얼마간 이러고 다녔지만 사실 여자아이는 어리고 바보같아보이는 이 머리모양이 영 못마땅했다. 여자아이는 어려서부터 책읽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에는 신기하고 알 수 없는 일들이 잔뜩 쌓여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게 될 때, 숨겨져있는 사물의 이면을 발견하게 될 때, 여자아이는 무엇보다 큰 만족감을 얻었다. 끝없이 생각하고 탐구하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있다고 믿었다. 자기의 주관도 없이 가슴만 큰 여자들이 여자아이는 제일 경멸스러웠다. ‘그래서’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여자아이는 남자에도 연애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무관심 이상의 어떤 거부감도 있었다. 
   그 남자아이를 처음 대했을 때, 여자아이는 그런 자신의 편견이 얼마쯤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무척이나 특별해 보였다. 그런데 역시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의 인내가 부족한 채로 섣부른 결론을 내려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도 몇 번이나 의심해봤다.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부드러운 웃음은 변화가 없어서 금방 질렸다.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그에 비하면 지식이란 것은 아무런 대답도 요구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항상 새롭고 끝을 모르게 깊이가 있었다. 여자아이에게 그 양자는 우열로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여자아이는 지금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유를 따지며 매달리는 남자아이와 한참 실갱이를 벌이고 난 다음이라서인지 많이 피곤했다. 빨리 쉬고 싶었다. 어제 읽다가 중간에 잠들어버린 책이 있었다. 커피 한잔을 타서 옆에 가져다놓고 푹신한 쿠션에 기댄 채 바스락거리는 책장을 넘기고 있을 삼십분 후의 자기모습을 상상한 후에야 여자아이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택시가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확인하려 여자아이는 창 밖을 바라본다. 등받이에 기댄 몸을 조금 끌어올리고, 옆으로 돌려 빼어들은 시선에 늦은 밤의 쓸쓸한 거리모습이 담겼다. 그 풍경의 작은 부분으로 내가 있었다. 흘려 지나치고 난 그 잠깐의 뒤에도, 여자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아이는 성산시영아파트 십동 오백오호의 잠겨진 문을 끌러 연다. 깜깜한 어둠 속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고 보니, 식탁 위에 과자그릇으로 눌려진 쪽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은아야, 외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부산에 내려간다. 여자아이의 엄마는 그 다음에 또 무슨 말을 보태야 하는 건지를 잠깐 생각했을 거다. 여자아이는 꼼꼼하고 부지런한 성격이어서, 그런 딸에게 학교에 늦지 말아라, 문단속을 잘해라, 하는 의례적인 당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엄마는 잠깐 망설인 끝에 결국 그 정도로 볼펜을 놓고 말았다. 여자아이는 커피포트에 물을 받아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는다. 가스렌지는 벌써 칠년째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집 안의 다른 가구들이 그렇듯이 빛이 바래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기도 하다. 
   아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은아가 아니고, 남자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자아이의 집은 성산동에 있지 않고, 여자아이는 책을 읽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송희였다. 한송이 두송이 할 때의 송이인가요? 하고 사람들이 물어올때마다, 제 이름은 한글이름 송이가 아니구요 기릴 송자에 기쁠 희자를 쓰는 그 송희에요, 여자아이는 인내심있게 설명해 주면서도, 싫은 기색을 내비치거나 했던 적은 없었다. 놀림삼아 불려지던 말숙이라는 자기 어린시절의 이름이 죽을만큼 듣기 싫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런 작은 헤프닝들은 오히려 얼마쯤 기분좋은 것이기도 했다. 
   여자아이는 적당히 외지고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또래 아이들이 많지 않은 동네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여자아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여물을 지어 날라놓고, 검둥이가 느릿느릿 되새김질하는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도 깜박, 여자아이의 시선은 그 한꺼풀 뒤쪽 망망한 공상 속을 헤매고 있게 되기가 일쑤였다. 여자아이는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상상 속에서 여자아이는 업무차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는 패션 디자이너였던 적이 많았다. 
   여자아이에게는 삼촌이 한 명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여자아이도 한참 머리가 크고 나서야 알았다. 젊었을 적 거지같은 집안 꼴이 보기 싫다며 무작정 집을 뛰쳐 나가버렸었다는, 그 후로 죽었는지 살았는지의 소식도 없이 식구 모두에게 잊혀진 사람으로만 되어있었던 삼촌은 여자아이가 열아홉살이 되던 해의 설날에 까만색 엔터프라이즈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숙이를 그냥 저대로 집안일이나 하게 썩혀둘 겁니까. 요즘 세상에, 아무리 계집아이라고 해도 고등학교는 마치게 해야지요. 시집을 보내건, 다른 일을 시키건 시골 중학교 고작 나온 학력으로는 밑바닥 인생이나 평생 헤매기 십상일텐데요. 여자아이를 안스러워하는 삼촌의 말에 여자아이의 어머니는 그래, 내 생각도 그렇다니까, 맞장구를 치면서도, 그런데 서방님도 잘 알겠지만 집안 형편이 어지간해야지요.... 말끝을 흐리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비굴한 눈빛으로 삼촌을 바라보았었다. 
   여자아이는 집을 싫어했다. 조그만 방구석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노린내를 피워내기만 하다가 자기가 싸놓은 오줌이 질척거려 울음을 터트리곤 하는 할머니도 싫었고, 돈한푼 벌어오지 못하면서 술만 마시면 큰소리치고 주먹을 휘둘러대는 아버지도 싫었다. 여름이면 똥파리가 들끓고 겨울이면 내놓은 엉덩이가 차가운 바람에 쓸려 애리게 되는, 판자짝을 엉성하게 이어 만든 변소간도 싫었다. 그랬는데, 삼촌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는 날 차창 뒤편으로 집이 멀어져 결국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자아이는 어째선지 찔끔 눈물을 흘려내고 말았다. 쓸쓸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가슴을 채워왔던 건 스스로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아이가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업이 망하자 돈을 벌어오라고 여자아이를 술집으로 떠민 것도 삼촌이었다. 잠깐만이면 돼. 날 못믿겠니? 가진 것 하나없이 시작해서 자수성가까지 했던 인간 이철민이야. 상황이 안좋아 이렇게 됐다만 다시 일어서는 건 시간문제라구. 일년, 아니 반년만 참고 기다려라. 그 다음엔 다시 학교 다니는 거야. 대학교도 내가 꼭 보내줄거다.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삼촌은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더니, 어느날 완전히 여자아이의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처음 얼마동안은 역하게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견뎌내는 것만도 힘이 들었다. 술과 피곤에 절은 채 힘겹게 하루를 견뎌내고 나서는 늘어진 몸을 끌듯이 움직여 두평짜리 자취방 안으로 밀어넣곤 했다. 죽은 듯 잠이 들고 난 그 다음에는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틈틈이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하고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을 가야겠다는 결심은 세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돼버리고만 말았다. 
   세상에 견뎌지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저런 이름의 룸살롱, 단란주점을 옮겨다니면서 십삼년이 지나갔다. 여자아이는 생활에 적응하게 됐고, 이제는 그것이 여자아이를 붙잡는 구속이었다. 여자아이는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자기가 가끔씩 싫어질 때가 있었다. 
   여자아이가 아직 삼촌과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때, 새벽 두시를 넘긴 늦은 시간에 택시를 타고 연희동을 지나갔던 적이 있었다. 여자아이는 잠을 자고 있던 도중에 전화를 받았다. 친구를 소개시켜 줄테니 명동근처로 나오라는 삼촌의 어느정도 술이 오른 목소리를, 여자아이는 차마 불편해서 싫다는 대답으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옷을 대충 주워입은 다음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서도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머리가 아직 무거웠다. 손을 올려 입을 가리며 작게 하품을 한다. 그 때, 나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귀신에 씌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어서, 나는 조금을 더 걸은 다음 연희교차로 앞에 선다. 길눈이 어두워 혼자 헤맸을 뿐, 모르는 길만이 영영 이어진다는 따위, 그런 장난같은 일이 정말로 일어날 턱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연남동에서 동교동으로 이어지는 큰 길을 지나며, 나는 어떤 이질감을 느낀다. 늘 지나다니던, 몇걸음을 더 걸으면 어떤 골목이 나온다고 외울수도 있을 것 같은 익숙한 거리 모습이 그 위에 무언가가 겹씌워진 채 일그러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깜박깜박 어색하게 느껴지는 거다.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모르는 길을 하도 헤매 다니느라 진이 빠져서 그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아있게 된 거겠지, 웃고만 말았다. 날씨가 추웠고, 쌀쌀한 냉기에 벌써 몇시간째 몸이 얼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 끝에 몰아쳐오는 몇차례의 매서운 바람을 참아내기가 힘들다. 바짝 굳은 손등을 올려 흘러내리는 콧물을 재차 닦아내고 몸을 조금이라도 더 움츠리는데 열중하면서, 상념은 더 번지지 못하고 그대로 잦아들어갔다. 
   대충 양말만 벗어놓고 누워버리면 다섯시간은 잘 수 있겠다. 내일 거래처에서 브리핑해야 할 내용은 지하철 안에서나 대충 정리를 하면 되겠지. 이번 계약에 걸려있는게 자네 십년치 봉급이라는걸 명심하게 어쩌구 잔소리를 늘어놓던 과장 모습이 떠올라서 자기전에 자료를 한번 살펴보기라도 하는 게 좋을까 잠깐 고민해보기도 하지만,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아서 회사보다는 잠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려버리고 만다. 그 비교 대상이 국가라거나 사회정의라거나 그렇게 거창했더라도 결정은 역시 같지 않았을까. 
   불이 꺼진 내 집 문 앞에 서게 됐을 때는 완전히 지쳐버린 다음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삼류 코미디같이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흐느적흐느적 움직여 열쇠를 꺼내고 문 손잡이에 꽂아넣으려고 한다. 나는,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열쇠가 딸각, 구멍 안으로 들여넣어지려던 그 순간, 뻗었던 손은 다시 조금 뒤로 움츠러 들었다. 행동을 멈춘 채 나는 잠깐을 망설이게 된다. 
   이 열쇠로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밀어넣은 열쇠가 무겁게 삐걱대기만 할 뿐,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돌려지지 않는다면. 엄마와 누나를 소리쳐 부르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대도 그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막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굳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