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바다로 
   
   
   전용태 
   
   
   
   1. 
   특별히 먼저 그를 생각해 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간절한 의미로도 아니게 문득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지쳐 있었다. 그 가을,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일도 잘 되지를 않았다. 벌써 며칠째 집안에 틀어박혀 일에 매달려 있었지만 전혀 진전이 없다. 여름이 시작되면서부터의 긴 슬럼프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들기며 하나의 문장을 몇번이나 썼다 지웠다 하다가는 지겨워서 결국 포기해버린 다음이었다. 여행이나 갔다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지도 몰라.. 그런 계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슴에 무엇이 낀 듯 답답해서 그것을 어떻게라도 떨쳐버리고 싶은 기분만이 절실했다. 
   지도책을 펴놓고, 어디가 좋을까.. 동해안 쯤을 바라보고 있다가는 문득 그가 속초의 어디께쯤 살고 있다고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바다구경을 겸해서 그를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것도 좋겠지, 싶었다. 
   그는...... 
   그는 가끔씩 생각나곤 하는 옛 기억들 중의 하나다. 자율학습시간에 같이 땡땡이를 치곤했던 수희, 별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걸어오던 지영이, 술을 먹이려고 지독히도 애쓰던 독서부의 오빠들....... 그런 자잘한 기억들 속에 그는 섞여 있었다. ‘세계를 정복하겠어.’라고 진지하게 말했던 아이, 사람을 죽이고 그 살점을 씹어 먹었던 아이.. 라고, 그 기억의 내용이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말이다. 8년전의 그 졸업식날, 그와 약속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라고. 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약속에 대한 부담이 특별히 있지도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의 8년, -게을렀기 때문이지만- 그만큼의 시간동안 그와는 한 번도 연락해본 적이 없다.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독서부의 졸업생모임에서라거나 친구들의 지나가는 몇마디 속에서 우연찮게 그의 얘기를 얻어듣곤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어디에서 산다던데. 유학갔다가 돌아왔대. 계 요즘 잘 나가는 것 같더라. 그런 따위. 
   어느 가을날 동해안으로의 여행계획을 짜다가 문득 다시 그의 생각이 들었대도,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거다. 그 순간 지영이나 수희의 생각이 대신 났대도 상관없는 그런 정도. 
   
   2. 
   나는 궁금했다. 사람들은 그래 보이는 만큼이나 정말로 자신의 삶을 절실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렇다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위선은 전혀 없으며 이상한 것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나’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납득하면서도, 하지만 가끔씩은 그것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만다. 지겹게 떠들어지는 삶, 죽음, 갈망, 그런 단어들의 의미가 한없이 낮설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 
   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살피고 그것을 분석하려고 해본다. 그런 것들로부터 유추해서 그 ‘의지의 본질’을 파악하기를 바랬다. 그것을 이해하고, 부디 느낄 수 있기를. 
   그는 늘 무언가를 향해 있었다. 그 ‘무엇’이 그에게는 있었다. 꼿꼿이 쳐들어진 눈빛은,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 조차도 어떤 분명한 방향을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었을까. 그를 처음 본 것은 서클의 입부 면접 때였다. 같은 반이라는걸 알게 된 것은 오히려 그 다음이었다.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특별하게 나를 끌어당기는 뭔가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 눈. 무척이나 탁하고 깊은 눈동자. 아니 그렇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무엇’이 그 안에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면서도 얻지 못한 것. 자기를 완결시켜 확고하게 하는 힘. 흔들리지 않는 것. 그래서 스스로를 살아가게 하는 어떤 믿음... 무엇이었을까. 내 시선은 그의 뒤를 쫒고 있는 때가 많았다. 나는 그를 지켜본다.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표정, 하는 말, 행동들.. 거기에 ‘그것’이 드러나 확실해지기를 기다렸다. 
   
   4월.. 새로 학기가 시작되고 한달 남짓이 지났다. 서로 몇번 얼굴을 마주치긴 했지만 그뿐, 그동안 그는 내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 못했을 거다. 어쨎거나 그와는 제대로 한 번 이야기를 나눠 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말을 걸어왔다. 그와는 어쩌다 마주치면 아는척을 하기나 하고 마는 그런 정도.. 그 이상의 아무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의외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녘이었다. 나는 아무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복도의 창 턱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서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허름한 빌딩들 너머로 무너지는 해, 한점 구름없이 온통 빨갛게 물든 하늘, 따위. 아니면 하늘을 까맣게 메운 먹구름,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우산을 받쳐들고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는 사람들... 아무렇대도 상관없을 의미없는 풍경들. 의미없음. 
   그는 그냥 우연히 그 시간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내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내쪽을 바라보고, 그러다가는 불쑥 말을 건네왔던 거다. 
   “뭐가 그렇게 슬프니?” 
   그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넑빠진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아이가 특별히 눈에 박혔을 수도 있다. 그때의 내 기분이 특별히 ‘슬프다’라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드러난 표정이 그에게는 그렇게 해석됐을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그 순간 나는 그렇게나 -지나가는 별 상관없는 사람의 발걸음을 끌어 세우고 말을 걸게 했을 만큼이나- 절실하게 처량한 꼴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냥, 별로.. 아무것도 아니야.” 
   너랑 상관없잖아? 그러니 쓸데없는 참견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줘.. 그런 식으로 그를 무안주려는 의도가 섞였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뱉어놓고 보니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싶다. “책을 보거나 책상에 엎드려 잠깐 잠드는게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그냥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니까.” 괜한 변명을 덧붙여 보고는 그것이 또 혼자 쑥스러워져 고개를 조금 숙인다. 
   그의 ‘그’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지겹다면 맞을까? 그래, 단지... 지겨울 뿐이야.” 
   “지겨워?” 
   “항상 그렇지. 걷고, 숨쉬고, 먹고, 말하고, 느끼고, 보고, 듣고 하는 그런 것들. 무언가를 하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슬퍼하고, 화내는 것.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죽는 것조차도 한없이 지겹게만 느껴지는 그런 것. 알 수 있겠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나는 부실의 낡은 쇼파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독서부실은 학교 뒷산에 기대 있어서 창문 밖으로는 촘촘히 늘어서있는 나무들이 채워져 보일 뿐이었다. 거기에 막혀 부실에는 햇볕이 잘 비춰들지를 않았다. 그때문인지 어둑한 방 안의 공기는 눅눅하게 젖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는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조금 더 차분해 보인다. 아이들의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도 가라앉은 풍경의 하나로만 느껴지는 그런 것. 나는 몸을 뒤척일때마다 삐걱삐걱 신음을 흘려내는 낡은 쇼파에 앉아 책을 읽거나 하면서, 할 일 없는 느즈막한 오후의 지루함을 즐기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칸막이처럼 새워놓은 책장 너머에는 원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때가 많았다. 그 사이에 끼어서 아이들의 소소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아니면 떨어져나와 멍하니 비냄새를 맡아보는 일도 좋아했다. 
   언젠가 우연히 그와만 덩그라니 부실에 남아있게 된 적이 있다. 다른 학교에서 무슨 문학행사인가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거기에 갔을 거였다. 
   “너한테 ‘지겹다’라는 건 어떤 의미인 거지?” 
   그는 쇼파에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한쪽에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고 있던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훔쳐보는 내 시선을 내내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그는 문득 눈을 뜨고 그 시선을 들어 나를 마주 쳐다봤던 거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물음을 던졌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지겹다.. 라고 할 때, 너한테 그 ‘지겹다’라는 말은 어떻게 정의되는 거니?” 
   얼마쯤 어리둥절해 한 다음에야, 아아.. 그때의 계속인 건가.. 하고 나는 납득했다. 
   “글쎄.... 남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듯한 그런 느낌.. 이라면 맞을까?” 
   그렇게 말을 꺼내 놓곤, 그 다음을 어떻게 이어가야 좋을지 조금 당혹해 한다. 늘 하고 있는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한 말로 만들어내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가 있을까. 아니 가능하기나 할까.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나는 떠듬떠듬 생각을 최대한 정리해 뱉어내려고 애써본다. 
   “자기에게 거리를 느껴본 적이 있니? 나는 분명 여기에 존재하는데, 지금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분명히 난데, 그렇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없는 그런 거. 진짜 나는 어딘가 먼 곳에 있어. 거기, 절대로 손이 닿을 것 같지 않은 먼 곳에 웅크리고 앉아 이 또하나의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이야.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공허하기만 해. 나는 울고,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하지만 그러는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하나의 나는 그런 자신을 시큰둥하게 관조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래?” 
   그래. 그런 것이겠지.. 나는 꺼내진 말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본다. 
   그가 묻는다.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니?” 
   너는 죽음이 뭔지나 알고서 그걸 ‘지겹다’라고 감히 말하는 거니? ...그런 물음이겠지. 
   “어느날 밤이었는데, 난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서 가장자리의 난간을 밟고 걸었어. 한쪽 옆의 아득한 허공을 한 번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 맞은편에서 부딧쳐오는 바람에 밀려서,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몸이 낭떨어지로 크게 밀려지는 그런 감각을 느끼면서. 그리고 그것이 시시해졌을 때, 나는 눈을 감고 나머지를 걸었어. 결국 죽지 않았지만 죽을 수도 있었겠지.” 
   “재미있었겠는데?” 
   “별로. 그래.. 그것이 정확한 의미의 ‘죽음’은 아닐지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의 죽음’일 수는 있었으니까. 그걸로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래. 그게 오직 중요하겠지. 스스로에게 의미있는건 ‘있는 그대로의 실제의 현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받아들여져 나름대로 해석된 현상’일 뿐이니까. 그래, 그럴테니까. 실제의 현상이 아무 왜곡없이 파악돼는 것이 아무래도 불가능한 다음에는 말야.” 
   “삐긋.. 균형을 잃고 몸이 크게 흔들려 떨어질 것처럼 됐을 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어. 이대로 죽는건가? 그런거구나.. 하고 그냥 덤덤하더라. 나는 반대쪽으로 몸을 움직여 다시 균형을 잡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했던 것 뿐이지. 그때,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지금 내딛는 한발이 허공을 디디고, 기울어진 몸이 그 아래로 떨어져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나는 얘기를 계속했다. 이런 얘기, 하는 쪽도 듣는 쪽도 재미없을 뿐일텐데.. 싶지만,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까닥 거리면서 그 다음을 부추긴다. 
   “정신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 속에 파묻혀 봐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 현실에 이리저리 치여 숨이 막힐 정도가 되면 그 안의 나를 보다 분명하게 자각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그런 생각. 그런데 그렇지도 않더라. 현실이라는게, 그리고 그 현실을 사는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는 눈을 감고 떠올리는 몽상만큼이나 흐릿하기만 해.” 
   “잘못된 규정에 얽매이고 있는 건 아니야? 아무의 ‘현실’도 남의 그것과 꼭 같지는 않아, 너는 아무래도 현실에 섞이지 못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현실에 섞이지 못하겠는 상태’ 자체가 너의 현실 아니니? 거기에 얼마나 치열할 수 있느냐가 오직 의미있는 거겠지.” 
   “글쎄.” 
   
   3. 
   몇 명을 건너 물어서 그의 지금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은수. 명희. 그리고 마지막의 광호. 
   -무슨 일인데? 왜 걔한테 연락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음.. 그냥 좀.” 
   -....... 
   명희는 머뭇머뭇 망설이다가 “광호가 걔 연락처를 알긴 할거야.” 그러더니 또 그런 말을 덧붙였었다. “그런데 걔한테 연락할 생각은 그만둬. 그러는게 좋을거야.” 
   “왜? 무슨 일 있었니?” 
   -...모르고 있겠지. 자주 만나는 애도 아니구, 또 광호도 그 일 말하는 걸 왠만하면 꺼려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알고있는 애들도 별로 없구. 음, 이런 말 해도 되나? 광호, 걔한테 사기당했어. 
   “사기? 둘이서 동업해서 같이 무슨 일인가 한다고는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그래. 그랬었는데 걔가 배신한 모양이야. 그것도 처음부터 아주 계획적으로. 
   “응?” 
   -걔가 광호한테 먼저 사업을 해 보자고 제의했었나봐. 무슨 전자 부품을 수출하는 일어었다나.. 조건도 썩 괜찮은 편이어서 광호도 발벗고 나섰지. 사업은 나름대로 괜찮아서 돈도 꽤 모았다는 것 같은데, 알고보니까 걔는 그 회사를 이용해서 뒤로 무슨 마약을 거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마약?” 
   -그래, 황당하지? 그걸 숨기기 위한 껍데기가 전자부품 수출업체라는 간판이었고 광호는 희생양이었던 거지. 광호가 그 사실을 안 건 경찰이 사전 수사를 마치고 회사에 들이닥쳐서였어. 그 전까지는 회사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조차 까맣게 몰랐지. 어떻게 됐을 것 같니? 걔는 벌써 어디론가 발을 뺀 다음이었고 영문도 모르는 광호가 전부 덤테기를 썼어. 광호가 회사 대표로 법인등록이 되 있었으니까 말이지...음, 부인만 있는 광호 집에는 그 다음부터 걔가 보낸 깡패들이 설치면서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대고 광호는 어쩔 수도 없이 감옥에 들어가서 몇 년을 살고 나왔다는 거야. 몇주전에도 우연히 한 번 만났었는데 애가 완전히 폐인이 돼 있더라. 
   “아.. 그랬구나.” 
   나는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무슨 일로 연락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알았으면 이제 걔하고 관계맺을 생각은 그만 둬. 걔 위험해. 그동안 어떻게 살고 어째서 그렇게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니? 생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친구한테 말이야.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오히려 얼마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다운 일이군.. 하는 생각에서였다. 명희는 그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원래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마약에다 깡패라니.. 그 방식이 조금 엉뚱하긴 했지만 그것도 아주 낮선 것은 아니었다. 
   전화했을 때 광호는 내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한참 기억을 더듬는 모양이더니 “고3 때 같은 반이었잖아.”하고 도와줬을 때에야, “아. 그래, 알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 잠깐 헷갈렸던 것 뿐이야. 왜 그럴 때가 있잖아. 그래. 정말 오랬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부산을 떨면서 새삼 반가워한다. 그의 그런 들뜬 목소리에도 어느정도의 지친 기색이 섞여있는 것을 느낀다. 명희한테 그런 말을 들은 다음의 선입견 때문일까. 
   “그럭저럭. 너는 어때?” 
   명희에게 얘기를 들은 다음이었지만 아무 일도 모르는 체 한다. 그와의 일을 알고있는 척 나서서 주절주절 늘어질 신세한탄을 끌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거기에 일일이 맞장구를 쳐주고 해야 할 일은 적어도 지금은 사양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의 연락처만을 얻어 듣고 이 거북한 통화를 마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본다. 
   “음.. 나 왜 전화했냐면 말이지...... 
   
   4. 
   3일동안 학교를 빠졌다. 
   며칠 전부터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참이었다. 그날의 아침은 특히 그랬다. 학교에 가고 사람들과 부대끼고 짜여진 일상을 견뎌내야 할 일들이 아무래도 짜증스럽게만 느껴졌다. 학교에 갈 요량으로 교복까지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가는, 결국 버스정류장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바다를 보고 싶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만원짜리 몇장이 있었다. 특별히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도 없이 나는 마음이 내키는 쪽으로 아무렇게나 발걸음을 옮겨놓아본다. 그렇게 닿은 곳이 서해의 무슨 해수욕장이었다. 
   늦봄, 바닷가는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이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시야 가득 들어오는 파란색 바다, 돌아보면 낮은 제방 너머로 문을 닫은 상점과 민박집들이 색이 바래 뭉뚱그려진 채 늘어서 있었다. 그렇게, 낮선 풍경 속에 자신을 세워보는 것이 좋았다. 가끔씩 이러고 싶을 때가 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다. 나는 밀려오는 파도의 옆을 걸었다. 희미하게 이어진 수평선을 눈으로 쫒고 파도가 서로 부딧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러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됐을 때까지 나는 거기에 있었다. 그냥 그랬던 것. 
   이틀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여느때처럼 건조한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학교에서 전화 왔었다. 니가 무슨 짓을 하면서 싸돌아다니든 상관하지 않겠다만 집으로 연락이 오지는 않게 해야 될 것 아니니. 니 처신 하나 제대로 못해서 집안을 시끄럽게 만들어야 되겠니? 
   
   다시 등교한 날, 담임에게 끌려가 몇시간 동안이나 길게 이어진 잔소리를 견딘 다음, 학생부실을 나와 복도를 걷던 도중에 그를 마주쳤다. 그는 같은 반인 영우와 마주서서 무언가를 얘기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곤 손을 들어 아는체를 한다. 맞은 편의 영우는 내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금방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는 표정이 차갑게 굳어있는 것이, 둘이서 무슨 대단한 얘기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 영우의 맞은편에 서서 벽에 몸을 비딱하게 기대고 있는 그는 하지만 자뭇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었니? 3일동안이나 결석을 하고. 담임은 니가 아파서 집에 누워 있다고 했지만, 그건 아니지? 그렇다면 이렇게 학생부실까지 불려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바다에 갔다왔어.” 
   “바다? 왜?”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 그런 대답이 그에겐 조금 엉뚱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하긴 다른 누구라도 그랬을 테지만. 
   “말했었던가? 너, 보기보다 재밌는 녀석이라고.” 
   나는 힐끔, 시선을 돌려 영우의 초조해하는 표정을 살핀다. 내가 빨리 가버려 아까의 대화를 계속하고 싶은 거겠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참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얘기 계속해. 나 가볼께.” 
   “그래. 있다가 부실 갈거지?” 
   “응... 오늘 세미나 있는 날이었지?” 
   교실로 돌아오면서 어째서인지 영우의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불안하게 떨리고 있던 그 눈동자. 그리고 그런 영우를 바라보던 그의 심상찮은 미소도. 
   
   써클 활동은, 제대로 하려면 꽤나 빡빡한 편이었다. 매주 있는 세미나를 위해 커리를 읽고 자료를 모으고 서평을 쓰는 일 정도도 만만치가 않다. 거기에 계절마다 돌아오는 무슨무슨 행사의 준비로 항상 바빴고 연말에는 회지를 작업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냐면, 나는 내 마음내키는데로 하는 식이었다. 커리가 마음에 드는 때에는 나름대로 준비도 하고 세미나에도 열심인 편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커리를 읽어가지도 않아서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기만 하는 때도 있었다.. 라기 보다는 사실, 그런 적이 더 많았다. 스스로 선택한 일인 만큼 그만두지 않을 바에야 욕먹지 않을 만큼 해야겠다는 생각을 물론 가지고는 있었다. 그런만큼 노력도 해 봤지만, 딱딱한 문학이론이나 문학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지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는, 그런 나와는 사뭇 다르게 서클 일에 열심이었다. 신입생이었지만 그는 벌써 모임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많은 분야의 지식에 해박했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자신의 견해로 만들 줄도 알았다. 그런 것들로 만들어진 하나의 분명한 주관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는 논리정연했고, 논란의 중점을 파악해, 그것을 가장 적당한 말로 정리할 줄 알았다. 거기에 덧붙여지는 그의 의견들은 세미나를 보다 활기있게 만들고, 토론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들이었다. 그는 말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러는 것에 -예를 들어 ‘저놈 또 잘난척 하는 구나’ 하는 식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뱉어내는 한마디씩에 신중해 보였고, 또 그만큼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들을 줄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 틀리다. 그렇다는 것은 보여지는 겉모습일 뿐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사람이 역시 무언가를 얘기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 무엇일까. 막연하게 느껴지는 어떤 이질감. 
   “너는 어째서 말을 하니?” 
   그날 세미나가 끝난 후의 뒷풀이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끼리끼리 술마시고 떠들어대느라 자기들끼리 열심인, 그래서 아무도 둘에게 관심이 없는 틈을 타서. 
   “응?”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의 얘기를 듣고, 거기에 반응을 하는거니? 무슨 이유 때문에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거야?” 
   “그런 질문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더 할 나위 없이 우스운 질문이겠지. 미안. 이런 생각,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니까. 그러는거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것이 너의 경우에도 우스운 질문일 뿐인 걸까?” 
   그는 대답이 없다. 
   “너는 많은 사람들, 특별히 상관없는-그래, 아니라면 미안- 사람들하고까지 관계를 맺는데 열심이잖아. 단순히 좋아서, 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적극적이라는 생각, 그런건 그냥 내 개인적인 느낌일 뿐인 걸까? 나는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니가 그러는 데에 어떤 특별한 이유, 목적이라고 해도 좋지만 말야. 그런 걸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말야.” 
   “목적.. 이라고?” 
   그는 고개를 갸웃, 하더니.. 내 눈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봤다. 그러더니 씨익.. 웃음을 크게 지어 보였다. 
   “그런 식으로 들으니까 웬지 낮설지만, 그래.. ‘목적’이라는 게 거기에 섞여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도 틀리진 않겠다. 듣고싶니?” 
   “그래.” 
   “니 말대로 나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종류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고 노력해. 그들과 대화를 하고, 여러 상황에서 결정지어지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사고, 가치관, 감정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기를 바라지. 그건, 인간이라는 종을, 그리고 그 각각의 개채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규명해가는 나름대로의 방법이야. 너무 거창한가?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실험해. 그것으로 인간의 사고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 어떤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는 어떤 개성의 사람에게 부합되는지 정리해 내는 거지. 지금까지 연구됬던 심리학, 인류학류의 이론들을 검토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거기에 새로운 것들을 보태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런 거.” 
   난감해하는 내 표정을 눈치챈 때문일까. 그는 설명을 보탠다. 
   “나는 보다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해. 말한 대로의 심리학에 관한 것 만큼이나 다른 여러 규정된 학문에 대해서도 나는 비슷한 정도로 관심이 많지. 그런 거야. 나는 인간에 의해서 정의된 세상의 모든 가치, 정의, 규정을 그리고 그 인간 자체를 전부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래. 그 옳고, 혹은 틀린 가치, 상황명제들이 결국은 나에게, 존재하는 하나의 불변하는 확정된 진실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니까.” 
   확정된 진실... 그 낮선 느낌의 단어를 나는 입안으로 몇번 굴려 씹어본다. 
   “그리고 그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해줄까? ‘그것’은 별다를 것도 없이 그냥 조금더 강하고 편리하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지. 외국어를 배우고 운전면허를 따는 따위하고 별로 다르지도 않아. 그것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거야. 호의로 포장된 가면 안쪽의 진심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그 위선, 악의, 기만에 속아 상처받는 일은 없겠지. 그것으로 또, 보다 두꺼운 가면을 만들어 스스로 쓸 수도 있겠지. 내 진짜 모습 위에 남들에게 보이기를 원하는 대로의 만들어진 모습을 겹씌우고, 그것을 보다 단단하고 완벽하게 만들 수 있겠지... 나는 그것으로 남을 조종할 수도 있어. 상대의 심리를 예측하고, 그것을 내가 원하는 의도대로 변화시킬 수가 있지. 예를 들면 이런 거.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을 부추겨 살인을 하도록 만들 수도 있어. 상황을 설정하고, 거기에 대해서 그가 반응할 수 있는 여러가지 선택을 미리 봉쇄해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길만을 남기는 거야. 사람마다 다르겠지. 부추겨진 용기, 혹은 절박함, 피해의식, 비틀려진 자존심, 그런 것들이 그리고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방아쇠가 되겠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야. 개개의 사람과 상황의 미묘한 차이와 변화가 수많은 변수들을 만들어 내니까. 하지만 그렇게 어렵기만한 일인 것도 아니지. 그는 행동하고 그것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내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지. 그것으로 나는 속는 자가 아니라 속이는 자가 될 수 있겠지... 세상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야.” 
   무얼까. 아직도 흐릿하기만 하지만, 그에게서 느끼는 것, 그 터무니없을 정도로 뚜렷한 ‘의지’를 만들고 있는 작은 부분을 그 순간 본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막연하게만 들릴 법도 했을 그의 그런 얘기들이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은. 
   “그날, 나한테 처음 말을 걸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니? 새로운 표본같아 보여서?” 
   거기에 조금 비아냥거리는듯한 어조가 실렸을까.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씨익 웃음을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그래. 하지만 별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지? 알고 있으니까. 너도 나와 같다는 거.” 
   
   그 며칠 후에 영우가 죽었다. 3교시쯤이었을까, 수업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도 영우가 돌아오질 않았다. 땡땡이를 쳤나보다 그렇게 얌전하던 아이가 왠일이지.. 그런 정도로 대수롭지않게 생각하고만 있었는데, 그 시간 3학년 몇반인가의 교실에서는 대단한 소동이 벌어졌었던가 봤다. 수업 중에 난데없이 뛰어들어온 한 남자아이가 칼을 빼들고 지영이라는 여자아이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다고 한다. 휘둘러대는 칼날의 시퍼런 서슬에 사람들은 도망치기 바쁘고 지영이라는 여자선배는 그에게 목덜미를 잡혀서 질질 끌리며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고.... “믿을 수 있겠니? 그 남자아이가 바로 영우였대!” 지애는 바로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만큼이나 호들갑을 떨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무슨 이유였던 걸까. 어째서 그 여자아이를 죽이려고까지 했을까. 나름대로 추측하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영우가 죽어버렸으니 앞으로도 그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은 없다. 한사람, ‘그’를 제외하고는? 
   “영우, 걔, 몇번이나 여자애를 찌르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그러지 못했대. 여자아이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울부짖으면서 그 여자가 아니라 자기 목에 칼날을 꽂아 넣었다더라.. 둘이 어떤 관계였던 걸까?”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몇일 전 영우와 함께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던 그의 모습, 그리고 그날 밤 그와 나눴던 일련의 얘기들이 차례로 떠오른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고개를 돌렸더니 좀 멀리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내쪽을 쳐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5. 
   그가 물었다. 
   “세상에 옳은게 있다고 생각하니?” 
   “글쎄.. 무슨 의도의 질문인지 잘 모르겠는데.” 
   “정말로 옳거나, 아니면 정말로 틀린게 있을까? 이 세상에 쓰레기만큼이나 흔하게 널린 -정의.. 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가치’들, 굳이 예를 들자면 할아버지에게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는 것은 나쁘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나누는 구별들 뭐, 그런 따위...” 
   “글쎄.” 
   “가치라는 것은 일종의 함수와 같아. X의 A만큼의 행동이 각각의 ‘가치’라는 수식에 대입되 Y에 대해 B만큼의 대가를 창출하게 되는 거지. 단지 그 뿐이야. 옳거나, 틀린 ‘가치’는 없어. ‘가치’는 존재하지만 거기에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야. 모든 가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사람들은 각자 ‘다른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 단지 그 뿐이지. ‘자신에게 옳은’ 가치가 존재할 뿐이지, ‘절대로 옳은’ 가치란 없어. 만약 누군가가 장난으로 날 찔러서 팔을 자른다고 하더라도, 난 그를 죽도록 증오하고 미워겠지만, 그래서 나의 가치에 대입해 그를 응징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틀렸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는 역시 그의 가치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서로에게 강요하면서 살아가지. 인간이 사회를 이루는 이상 그것은 필연적인 일이야. 그것이 바로 ‘소통’이겠지. 그 가치의 강요에 대해 수용자가 그 가치를 비판해서 그것을 수용하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그런 정도의 강요라면 말이야. 하지만, 그 완결된 가치를 설명해 납득시키려는 이외의 힘이 그 강요에 실린다면 그것은 ‘소통’이상의 ‘강압’이 되버리지. 압도적으로 강한 외적인 힘, 권력, 돈, 집단의 이해, 그런 것들로 상대의 가치를 무시하고 자신의 가치로 꿇어앉히는 그런 일. 또 말하는데 그게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고 하는 자체가 또 하나의 ‘가치’고, 말했듯이 옳은 가치란 없으니까. 
   세상이 그런 식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면, 단지 나는 내가, 타인의 가치를 강압받는 자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나는 누구에게서도 그 비뚤어진 강압으로 나의 가치를 침범받지 않으면서 살거야.-아까 말했던 ‘소통’과는 다른 의미로 말이지.-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한사람이 되는 그것 뿐이라면, 그래, 그러기 위해서 세계를 정복하기라도 하겠어. 그게 내가 바라는 하나야.” 
   그리고 또 그는 물었다. 
   “세상에 옳은게 있을까?” 
   “니가 말하는 그 ‘가치’라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니?” 
   “제외한다? 글쎄.. 그보다는 ‘옳다’라는 개념의 규정이 다르다는 말이 더 적당하겠지. 아까는 옳다.. 라는 말보다 바람직하다.. 라는 말이 더 적당했을까. 지금은 존재형식으로서의 ‘옳음’을 말하는거야. 그래, 그런 차이. 가치도 결국엔 하나의 현상이지. 가치가 옳을 수는 없어도 가치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는 옳은 거잖아. 그런 거. 
   결론을 말해서,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그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절대적으로 ‘진실’이고 ‘옳아’. 존재한다.. 라는 결론은 그 존재가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니까.” 
   “형태가 없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잖아.” 
   “‘형태가 없는 것’도 일종의 ‘형태’지. ‘일정하지 않은’ 형태도 그 일정하지 않은 자체로 ‘일정한’ 것이지. 그런 반론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아. 
   모든 현상은 그 자체로 옳고 ‘절대로’ 진실이야. 하지만 말이지.... 그 ‘진실’은 너무나 먼 데에 있어. 사람들은 ‘현상’들에 대해 각자 해석을 내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어버리기 쉽지. 그런건 바보같아. ‘어긋나고 모자란’ 인간의 지식, 그 편견에 의해 파악되는 ‘현상의 진실’은 역시 왜곡되고 불완전한 다른 무엇이 돼 버리고 말 뿐, 그 ‘왜곡된 진실’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지식에 보태져 다른 ‘현상’을 파악할 때에 또 하나의 덧붙여진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을 뿐이겠지. 사회로부터 교육받고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그 비뚤어지고 헛점 투성이인 시각들을 별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그대로 굳혀가는 사람들이 더할나위없이 우스꽝스러워. ‘이 하나의 명제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비약이나 모순은 없나, 근거는 결론을 설명할만큼 충분한가....’ 그런 스스로에 대한 질문들은 아무리 지나치게 되풀이해도 사실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을 뿐인데 말이야.” 
   “어떻게 하더라도 실제의 현상이 있는 그대로 파악될 수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왜곡된 채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렇다면.. 그 왜곡의 정도가 얼마인지는 무의미한 거 아니니?” 
   “실제 그대로의 현상을 파악하는 것. 그것이 무한히 어렵다고 했을 뿐이지,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래. 그럴 거야.” 
   “니 말대로의 그 ‘사회로부터 교육되는 비뚤어진 선입견’에서 너는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자신하니?” 
   “그런 따위는 오히려 쉬운 장애지. 정말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게-힘든 것은, 존재하는 무한에 가까운 수의 현상들.. 그 각각의 ‘진실’을 파악할 도구와 방법이, 불과 몇조각의 확정된 진실과 비판적인 사고 뿐이라는 거야. 그래서 그것은 한없이 어려워 보이지만, 하지만 나는 믿어. 스스로의 존재 자체로 논증될 수 있는 ‘절대의 진실’들을 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각각의 ‘진실’들을 연관해서 또 다른 ‘진실’을 추론해 낼 수 있으리라고. 그게 시작이겠지. 그렇게 계속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진실’들로부터 새로운 ‘방법’을 끌어낼 수도 있을거야. 
   나는, 그래서 결국에는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실재를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그러기를 바래, 세상의 모든 ‘진실’을 볼 수 있기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또 한가지지.” 
   “아나키스트구나...” 
   “아나키? 그럴지도.. 하지만 분명한 하나는,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은 행동’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기 때문이어서’라는 거지. ‘왜곡된 현상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사는 그런 사람들보다 내가 ‘옳다’, 모든 현상은 왜곡없이 파악‘되어야 한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의 ‘가치’이겠지. 말했지만 옳은 가치는 없어. 그렇기 때문이야. 나는 그들을 비웃지만 틀리다고는 하지 않아.” 
   
   6. 
   따르릉.. 몇번인가 신호음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어떤 여자였다. 사장님이요? 지금 자리에 않계신데요. 연락처 남겨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몇시쯤이면 좋을까요? 
   
   7. 
   나는 모래의 벌판을 걷고 있다. 질척질척, 발목을 감아 잡아 끄는 모래의 무게가 무겁다. 한발짝, 그리고 다시 한발짝.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생각을 계속하지만 나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왜 걷고 있는 걸까. 
   이대 앞 골목 분식점에서 수희와 떡복이를 먹다가, 죽어버려야지.. 생각이 들었다. 
   
   “지랄같애..” 
   들어줄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 나는 같은 말을 벌써 몇번째나 내뱉고 있었다. 지랄같애. 정말 그래. 
   바람에 굴러 지나가는 구겨진 담배꽁초를 쫒는다. 꾸물꾸물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들의 숫자를 헤아린다. 열여덟, 열아홉... 그러는게 지겨워 파묻은 고개를 들어올리면, 바로 앞으로는 이름을 모르겠을 나무 한그루가 누렇게 익은 잎사귀들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다. 바람이 불어 지나가고 잎사귀 한 장이 떨어져 날린다. 사람들의 발길에 뭉개져 지저분하게 널부러진 낙엽더미 위에 한 장이 보태졌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늦은 오후의 무거운 햇볓 아래서 풍경들은 그렇게나 분명하다. 그것들은 거기에 분명히 있는 거다, 생각하면서도, 믿으면서도 나는 손을 뻗어보지 못한다. 
   연례행사같이 매년 찾아오는 가을병이 올해라고 빗겨가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잠을 깨고나면 문득 찾아와있는 조울증처럼이나, 그건 갑작스럽게 시작되곤 한다. 가슴을 찍어누르는 갑갑함에 비틀비틀 허덕대다가 나는 어쩔 수도 없이 결국 무너져 내렸다. 
   벌써 몇시간이 지났지? 나는 화단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일어나야지, 스스로를 재촉하지만 그래야 될 이유를 아무래도 생각해낼 수가 없다, 그런 계속. 뭐가 의미가 있을까. 또 어떻게 스스로를 속여 무엇인가에 매달리게 하고, 다시 멈춰설 다음까지의 몇걸음을 걸어가게 할 수 있을까. 지겨워. 지금까지만도 너무 지쳐서 신경은 벌써 너덜너덜 뜯어진 채다. 이젠 그만두자. 
   그만두자... 죽는 것 만큼이나 살아가는게 의미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죽어버리지 않은 것은,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때가 있을 거라는 그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우선 그때까지 살아있기로 하자.. 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지만 완전히 떨쳐버릴 수도 없었던 그 가느다란 구원에의 믿음. 하지만 그것을 계속 잡고 버티기에, 지금 나는 너무나 힘들고 지쳤다. 그냥 죽어버리는게 낫겠다... 
   떨어진 낙엽이 몇바퀴를 뒹굴어 발 끝에 멈춘다. 손을 뻗어도 나는 그것을 만질 수 없다. 알고 있다. 움켜쥔 손바닥을 뚫고, 손 등을 지나, 스륵.. 빠져나가 버리는 ‘현실’이라는 것의 감촉을 나는 몇번이나 느꼈었던가. 저 나뭇잎이 현실이라면 내가 허상인 거겠지. 
   가끔씩 나는 꿈을 꾼다. 아니면, 꿈인 나는 가끔씩 현실을 꾼다. 거기에서 나는 모래의 벌판을 걷고 있다. 
   처음, 
   나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에 있다. 아니면 끝이 있어도 단지 보이지 않는 것 뿐일까. 멀리 그어진 지평선 조차도 부옇게 피어오른 아지랑이로 흐릿하기만 한 그런 곳.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는 채 나는 보이는 것을 단지 본다. 구릉의 길게 뻗은 선을 따라 흘러가는 모래의 강을. 나는 맨살에 들러붙는 뜨겁고 습한 바람의 기운을 느끼고, 스스로의 안으로부터 울리는 심장의 거친 박동을 듣는다. 그렇게, 나는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픔을 느낀다. 어쨌든 텅 빈 하늘에는 태양이 살갖을 태울 만큼의 뜨거운 햇살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 아래의 모래바닥은 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달궈진 모래들이 따끔거리며 맞닿은 살갖을 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몸을 움직인다. 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는 것은 굉장히 어색한 느낌이지만 곧 익숙해진다. 나는 모래언덕이 만들어내는 작은 그늘의 아래에 몸을 숨기고, 그늘이 태양의 위치에 따라 모양을 바꿔갈 때에만 그것을 따라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나는 죽을 수도 있었다. 한나절의 낮과 밤동안의 모래벌판. 그것이 내가 볼수 있었던 풍경의 전부일수도 있었다. 그렇다는 확실한 예감이 들 정도로 -아무것도 알지는 못하지만- 상황은 나쁘다. 살갖을 녹여버릴 듯이나 하던 한낮의 열기는 해가 지자 적당할 정도로 식더니 곧 견디지 못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그 보이지 않는 얼음의 기포들이 맨살에 늘어붙었다가, 한움큼의 살점씩을 얼려붙여 뜯어내면서 떨어져 나간다. 
   바싹 말라 갈라졌던 입술은 금새 파랗게 굳어 부서진다. 몸을 어떻게 웅크려도 뼛속까지를 파고드는 지독한 한기는 감해지지를 않는다. 나는 참고, 참고, 참고, 참다가... 그러지 못해서 비명을 지른다. 입을 되는대로 벌려 의미없는 고함을 질러대고, 울부짖으며, 모래밭을 뒹군다. 
   몇백번의 낮과 밤을 지내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낮에는 더위를 그리고 밤에는 추위를, 그 지독한 아픔을 견디는 법을. 모래를 먹고 살아가는 법을. 사실 그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으면 되는지 몰라서 태어나자 마자 비참하게 죽어간다고 한다. 
   절박한 감정에 쫒겨, 걸을 수 있으니까, 나는 걷기 시작한다. 
   걷는다. 
   : 
   : 
   나는 항상 지쳐 있었다. 언제나 배가 주렸다. 힘이 부족하고 기운이 없을 때는 자신의 체중이 그대로 느껴진다. 눌려오는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며, 푹푹 가라앉는 모래위로 나는 힘든 한걸음씩을 옮긴다. 발바닥은 몇번이나 터져 피로 젖었다. 그런 상처 위로는 딱지가 지고 새살이 돋았다가는 곧 다시 찢겨 나갔다. 걷다가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쓰러져 눈을 감았다. 걷다가는 쓰러지고, 다시 걷는 일이 영원일 것처럼 계속되었다. 어디에나 모래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모래의 벌판이 이어질 뿐이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모래의 대지는 끝없이 모양을 바꿔갔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보이는 것 만큼이나 만지고 느껴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걷는다. 
   나는 걷는다. 
   나는 걷는다. 
   : 
   : 
   : 
   : 
   
   “너는 왜 사니?” 
   나는 그에게 묻는다. 
   “바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것이 삶에 미련을 가지게 하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되는 거겠지.” 
   “무언가를 바란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의미없게 느껴져.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잖아.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데. 존재하기 이전의 너와, 존재가 끝난 후의 너를 알 수 없다면 지금 이 세상에 있어서의 너를 완전한 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니? 그런 너의 생각을 완전한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니? 지금 무언가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니가 바라는 것일까? 너는 자신할 수 있니?” 
   그는 잠시 침묵, 그리고, 하지만, 곧 대답한다. 
   “그래.” 거기에는 조금의 주저하는 기색도 섞여있지 않다. 
   그에게는 그토록이나 분명한 하나가 나에게는 어째서 납득되지 않는 걸까. 나는 모래의 벌판에 있다. 저 멀리, 세계의 끝에 그어져 있는 지평선의 너머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걷고 걸어, 그 지평선에 이르면 하지만 거기에는 또다른 모래의 벌판 또다른 지평선이 펼쳐져 있을 뿐. 걷다가, 나는 문득 멈춰 서서 밤하늘에 흐르는 별무리를 바라본다. 그만둬야지.. 하고.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모르는 나는 어디로 걸어가야 할 지도 알 수가 없다. 이젠 다 그만둬야지. 
   
   8. 
   최민경. 양호선생의 이름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양호실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히 그녀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복도에서 몇번 스쳐 지나간 적이야 있지만, 그냥 그뿐. 
   그녀는 꽤나 미인이었고 나이도 채 서른이 못되었을까, 선생치고는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그게 주된 이유였을텐데, 그녀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당했다. 양호실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녀를 노골적으로 쫒아 다니는 아이들도 해마다 몇 명씩은 있었고, 남자 선생과의 가벼운 스캔들이라도 흘러 지나가고 난 다음이면 교실은 몇일동안이나 그 소문으로 떠들썩해지곤 했다. 별로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그런 이야기들은 자연히 귀로 흘러 들어오곤 한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던건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그녀는 현관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당황해서 그와 나를 몇번이나 번갈아 쳐다봤다. 그 다음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마주하고 있다가 건조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들어와.” 
   그것이 마법의 주문이기라도 한 양, 그녀는 현관을 막은 채 굳었던 몸을, 움직여 옆으로 비켜 섰다. 
   그날 그가 나를 초대했다. “우리 집에 올래? 재밌는 거 보여줄게.” 특별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수업이 끝나고 그를 따라 집 앞까지 온 참이었다. 벨이 몇번 울리고 열린 현관 문 너머에 낮익은 얼굴이 있었다. 양호선생이었다. 노란색의 귀여운 앞치마를 두른 채, 안타까워 보일 정도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서. 굳이 얘기를 듣지 않고서도, 둘이 그냥 누나와 동생은 아니구나.. 하고 짐작하게 만드는 그런 표정. 
   나로서도 별로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와 그녀의 관계가 무엇이든,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고 그것에 대해 알고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비밀에 개입하게 되는 것도, 거기에 따라 지어지는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가능하다면 사양하고 싶다.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고 거기에 맞춰 스스로의 태도를 꾸미고... 그런 일에는 소질도 취미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바로 그런 바라지 않는 상황에 놓여져 버린 거다. 어떻게 해야 되나, 망설이고 있다가 그의 재촉하는 눈빛에 쫒겨 마지못해 신발을 벗는다. 여기서 도망치듯 돌아가버리는 것도 우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집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그에게만 들리게 하려고 자기 딴에는 목소리를 낮춘 것 같지만- 그녀의 그를 책망하는 말이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내 뒷통수를 긁었다. 
   “뭐 전해줄게 있어서 잠깐 온 거야. 니가 와 있는지 몰랐으니까.” 
   그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거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려고? 알 수 없었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니까 새삼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에. 
   “나 좀 씼을게.” 그가 무책임하게 욕실로 들어가버리고 난 다음, 한참동안, 그녀와 나는 서로를 아주 외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상대의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채, 엉거주춤해 하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먼저 말을 건네 온 것은 그녀였다. 
   “우리 학교 학생.... 맞지? 친군가보네?” 
   “네. 같은 서클이에요.” 
   그리고는 또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녀를 피해 눈길을 돌렸다. 거실에는 유난히 책장이 많았다. 거기에는 제대로 읽기도 어려운 한자며 외국어로 쓰여진 제목의 책들이 잔뜩 꽃혀져 있었다. 
   “여기 있는건 그나마 적은 거야. 서재가 따로 있거든.” 
   “그래요?” 
   “책읽는걸 워낙 좋아해. 저사람...” 그녀는 고개를 까딱 움직여 욕실 쪽을 가르킨다. 
   “아, 네.” 
   그런 대수로울 것 없는 대화로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던 걸까. 그녀의 얼굴표정이 조금은 부드럽게 풀어졌다고 느낀다. 
   “어느정도.. 알았겠지? 음. 우리.. 사귀고있어.” 
   그녀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띄엄띄엄 고백하는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부끄러워선지 푹.. 고개를 떨궜다. 
   “이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줄래? 부탁할께.” 
   “그럴게요.” 
   그때 그가 욕실에서 나왔다. 이 부담스러운 대화를 더 이어나가지 않아도 좋게 됐기 때문에 그건 다행이었다. 나는 조금 안도하며 그를 쳐다본다. 내 시선을 따라 그녀의 주의도 그에게로 옮겨가기를 바라면서. 
   “둘이서 아직까지 이렇게 서있기만 한거야? 민경아, 차라도 한잔 만들어 주지 그랬어?” 
   “아.. 참,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까 찌개 끓이던 것도 그냥 올려논 챈데.” 
   그는 다가와 그녀의 옆에 선다. 팔을 둘러 장난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러지 마.” 그녀는 내쪽을 살피며 무안해하는 기색으로 그의 팔을 걷어내려고 한다. 그리고 다음,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알이 튀어나올것처럼 눈이 부릅떠지고 한껏 벌어진 입으로는 침을 흘려 늘어뜨리며 막힌 비명.을. 토.해.내.려.고. 한.다.?. 
   나는 그가 그녀의 머리 관자놀이 즈음에 무언가를 세게 찔러넣는 것을 봤다. 그것은 잠깐 사이의 일이었다. 그 다음에 보니, 그녀의 머리를 뚫고 반대쪽으로 비죽히 끝을 내민 그것은 십자 드라이버였다. 
   그녀의 고개가 더 그럴 수 없어 보일만큼 뒤로 젖혀졌다. 그녀는 거억.. 거억.. 거품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신음을 뱉어냈다. 들어올려진 팔이 머리를 향해 굽혀지다가, 툭.. 떨어졌다. 
   그녀의 몸은 그의 팔에 안겨 기대어진 채로 한껏 늘어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죽은 몸을 추스려 안은채 나를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숙여 크게 벌린 입을 그녀의 어깨부근에 가져다 댔다. 우드득.. 하고 거칠게 살점이 뜯기는 소리를 듣는다. 역한 피냄새가 피어올라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입 주위를 피로 적신 채 한 입 가득 베어 문 그녀의 살을 질겅질겅 씹고 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채 우두커니 서서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어이가 없다. 어째서 이런 갑작스런 전개가 된거지? 지금 일어난 일들에 이유를 붙여보려고 하지만, 모르겠다. 
   피냄새는 썩 좋지가 않았다. 드라이버 손잡이가 매달려있는 그녀의 비틀어진 얼굴도 볼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쇼파에 몸을 묻고 앉았다. 불쌍해. 어쨎거나 지금의 그녀는 살아있을 때보다 대하기가 편하긴 했다. 대답을 바라며 바라보는 난감한 시선은 이제 없으니까. 
   “내가 말했었잖아. 재미있는걸 보여주겠다고.” 
   그녀의 살을 씹어 삼킨 다음 그가 말했다. 
   “별로 재미있지 않은데.” 
   “그래?” 
   “왜 죽인거야? 날 재미있게 해 주려고?” 
   “그냥, 궁금했으니까. 사람을 죽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사람의 고기는 어떤 맛일까.. 하고.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말이야.” 
   어처구니없기에 앞서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얘는 단지 고기 맛이 궁금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아이구나. 나같으면 귀찮아서라도 못할 짓이었다. 
   “그래서 맛은 어땠어?” 
   조금쯤은 정말로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널부러져있는 양호선생의 시체를 가리켰다. “먹어봐.” 
   “별로, 생각없어.” 
   엄청 질길텐데.. 그딴 생각을 하다가는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 잘 생각했어. 사실은 별로 맛 없었거든.” 
   그 역시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나는 팔걸이를 잡고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갈래.”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을 신다가 문득 다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오늘, 왜 나를 데려온거야?”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왜냐하면, 니 반응이 궁금했으니까.” 
   “....어째서?” 
   “‘너’니까. 너한테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 어떤 특별함.” 
   그렇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는 나와 닮아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전혀 틀리지. 나는 어떤 규정으로도 얽매이는 것을 거부해. 가족, 국가, 종족, 그런 따위 나를 규정하는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부정함으로서 거기에서 자유로워 지려고 하지. 하지만, 그 ‘규정’을 부정한다는 자체가 그것을 결국은 의식하고 있고 거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겠지. 너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너에 대한 규정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 같아 보여. 너는 생각하기에 앞서서 느끼고, 논박해 부정하는 대신 모든 규정을 처음부터 규정으로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거기에 영향받지도 않지. 그렇게 너는 항상 ‘너’인거야.” 
   “내가 멍청하다는 얘기를 빙빙 돌려서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나는 그렇게 특별한 사람 아니야. 그냥 허무주의 여고생, 찾아보면 전국에 300명쯤 더 있을걸.” 
   나는 그가 그녀의 시체를 욕실로 끌어다 놓는 것을 얼마쯤 더 지켜보다가 그의 집을 나왔다. 
   “몇일동안은 계속 고기만 먹게 생겼는데. 질려버릴지도 모르겠어.” 
   그는 농담처럼 말하며 씨익.. 웃었다. 
   
   9. 
   학교에는 ‘666’이라는 이름의 비밀모임이 있었다. 비밀모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누구누구가 모임의 회원이고 어제는 또 무슨 짓을 저질렀다던데.. 하는 식의 얘기들을 얻어듣는 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모든 규정된 가치에 반대한다.’였다. 그들은 몇번이나 떠들석한 사건을 일으켜 선생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임이 해체되지 않고 계속 유지된 것은 모임의 리더인 황민우라는 아이가 학교 이사장의 아들이었던 때문이다. 그들은 교무실 앞 복도를 ‘엿먹어라’하는 식의 낙서로 가득 채우기도 하고 선생을 납치해 집단구타를 하기도 했다. 들은 얘기지만 방송실에 모여 술과 마약을 가지고 난교 파티를 열은 적도 있다고 한다. 모임은, 내가 2학년일 때 생겨나서 3학년 여름쯤에는 여러가지로 학교를 어수선하게 만들면서 유명해져 버렸다. 
   처음부터 그렇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모임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리더라고 하지만 사실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은 그일 거였다. 나는 그의 방식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부추겨 날뛰게 만들어놓고 그는 그것을 지켜보며 즐거워하였을 거다. 
   언젠가 물어보았을 때, 그는 부정하지 않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모임을 만든 것도 그들의 모든 행동을 유도한 것도 나야.” 
   “666이라니. 특이한 취향인데?” 
   “멍청이들을 끌어들이기에 거창한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지 취향하고는 상관없어. ‘모든 규정된 가치에 반대한다.’라고, 말은 좋지만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짓일 뿐이지. 그럴듯한, 뭔가 있어보이는 가치를 내세워 머저리들을 설득하고 부추겨서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그런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야.” 
   “그래서 너는 뭐를 바란거니?” 
   “언젠가 말했었던 작업의 계속이지. 몰모트들을 복잡한 미로에 던져놓고 그 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는, 그냥 그런거. 아니면 그냥 단순한 심심풀이일수도. 그들은 스스로가 이 썩은 세상에 대해 단 하나의 의미있는 가치를 위해 가장 절실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는것에 얼마쯤 우월감도 느낄테고. 뭐, 상관없잖아?” 
   “니가 그들에게 설득한 그 가치에 대해서 니 생각은 어떤데?”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맞서는 것은 어리석어. 그러다 상처입고 죽을 수도 있지만 내 정의가 옳기 때문에 상관없다.. 라는 것은 단지 ‘멋있기’만 할 뿐이지. 나는 그러지 않아. 기꺼이 틀린 것을 진실이라고, 당신이 옳다고 말해줄 수도 있어.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건 상대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되고 난 다음에 하는 거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대해. 요즘 666의 장렬하고 비참하기 짝이없는 최후를 준비하고 있으니까.” 
   
   10. 
   밤기차를 탔다. 기차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신기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자기 나름의 사정으로 떠들썩한 그들 사이에 끼어서, 조금 잠을 자둬야지.. 하는 생각으로 눈을 감아본다. 몸을 기댄 등받이가 불편하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긁어 세운다. 그때문인지 아닌지, 쉽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이런 저런 잡생각들을 머리 속에 끌어와 채우기만을 계속하다가 결국 다시 눈을 뜨고 만다. 창문 밖으로는 까맣게 어둠이 내렸다. 사실 거기에는 집도 있고 논도 있고 할테지만, 흐릿한 별빛 아래로 보이는 것은 조금 더 짙은 어둠과 조금 덜 짙은 어둠 뿐이었다. 
   가방을 열고 노트를 꺼낸다. 꽤 오랫동안이나 막혀있는 채인 소설의 다음에 몇자를 이어보려고 하지만, 어렵다. 속초에 도착했을 때 까지의 꽤 오랜 시간동안 나는 노트의 빈 공간에 의미없는 낙서들을 끄적이고만 있었다. 
   시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몇십분을 지나 바다에 닿았다. 민박집들이 길게 막아선 사이를 빠져나간 다음, 나는 모래사장 너머로 잔잔하게 일렁거리는 새벽의 바다를 마주한다. 
   
   “광호에게서 내 연락처 들었다고 했니? 그럼 그 일도 알고 있겠구나. 내가 광호 이용하고 버린 거.” 
   말하면서 그는 재미있는지 쿡쿡.. 웃음을 씹었다. 
   “그래서 돈은 많이 벌었니?” 
   “뭐야. 나를 겨우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거야?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더 쉽고 훨씬 효율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그건 그냥 장난이었지. 니가 봐주었으면 했던.” 
   “나?” 
   “그래. 니 주변의 여기저기에 내 흔적들을 흘려놓는, 그건 그런 일들 중의 하나였겠지. 언젠가 니가 날 찾으려는 생각을 하게 됐을 때 그러는게 어렵지 않도록. 알겠니? 나는 계속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바닷가,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그 얼마쯤 뒤의 모래사장에 나는 무릅을 모으고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 걸까. 문득 어깨에 와닿는 온기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몸을 숙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안녕.. 하고. 
   벌써 해가 바다 위로 떠올라 있었다. 언제부터 그가 내 곁에 와 있었던 걸까. 그동안 잘 지냈니, 그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두고 만다. 그러는 것이 오히려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헤어지던 그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내려다보는 한없이 무거운 적회색 눈동자도 그때의 바로 그대로였다. 
   “신기해.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그 오래 전에서 너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용케도 그때의 모습을 지키고 있을 수 있었구나.” 
   “8년의 세월이 그렇게 긴 것은 아니었어.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도 나를 변하게 할만큼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 그런 때문이야.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계속에 있어. 아마도 영원히 그렇지 않을까.” 
   “니가 바라는 세계의 진실에는 보다 가까워졌니?” 
   “그래. 가까워졌다는 말이 우습게 들릴 정도의 보잘 것 없는 성과를 얻었을 뿐이지만 말야.” 
   “어째서?” 
   그는 크게 손을 뻗어 앞의 바다를 가리켰다. 
   “저 바닷물을 양동이로 전부 퍼내려는 그런 사람을 상상해봐. 그것보다 덜 무모할 것도 없는 일을 내가 하고 있는 거겠지. 진전이 느린 것이 아니라, 얻어낸 성과가 남은 나머지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그런 거. 바라는, 완전한 진실에 손이 닿기에는 또 얼만큼의 시간이 더 걸릴까. 7만년? 7억년? 모르겠어.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것이 얼마던지에 상관없이, 결국에는 끝이 있을 거라고, 거기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까. 그걸로 좋아.” 
   “그렇다면 그건 의미없잖아. 사람이 7만년이나 살 수 있을리 없으니까. 그 전에 넌 죽을 거고 결국 그 완전한 진실을 파악할 수도 없을거야. 그렇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어떤 가치가 있니?” 
   그는 작은 몸짓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죽지 않아.” 
   “너도 결국엔 인간일 뿐이잖아.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건 잘못된 가정 위에서 세워졌기 때문에 틀린 논리야.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야. 지금 이전에 존재했었던 모든 인간이 반드시 죽은 것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모든 인간도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단지 ‘비약’일 수 있을 뿐이야. 그래,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죽은 사람을 근거로 한 상당히 높은 -절대에 가까운- 확률을 가지고 있는 비약이지. 하지만 알겠지? ‘거의 불가능한 것’은 하지만 결국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지. ‘한없이 절대에 가까운 것’은 결국 ‘절대가 아닌 것’이야. 그래, 나는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지. 나는, 나를 죽지 않게 하겠어. 영원히 살아서, 바라는 절대의 진실에 닿을거야.” 
   “그 다음에는?” 
   그는 햇빛에 노랗게 물든 바다로 씁쓸한 미소를 묻었다. 
   “글쎄. 신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조커joker가 되겠지. 그 바깥에서 세계를 관조하고 조소하는 자가...” 
   
   11. 
   ‘고등학교 시절’이라는 말은 나에게는 그다지 의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전의 3년이나 그 후의 3년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저 흘러가는 삶의 부분이었을 뿐이지, 그 자체로 특별함을 가지는 어떤 한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에, 별 감상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그런 때문일 거다. 또 3년이 지났구나.. 하는 정도. 달라질 것은 없고 나는 또 어제와 같은 오늘, 내일을 살게 될 거였다. 다른때보다 일찍 등교한 정장차림의 아이들은 잔뜩 들떠서 수다를 늘어놓으며 서로의 연락처를 나눈다. 그런 모습이 내게는 얼마쯤 부러웠다. 
   졸업식이 끝나고, 여기저기 모여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로 어수선한 학교를 빠져나온다. 그러다가 교실에 지갑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 교실 문을 열은 거기에 그가 있었다. 황량하게 비워진 교실 안, 그는 창턱에 팔을 기댄 체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않갔구나.” 
   “그래.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손가락 끝으로 까닥까닥.. 만지고 있던 내 지갑을, 집어 건네준다. 그것을 받아들고도 나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뭐라고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텐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둘 곳 없는 시선을 돌려 빈 교실을 한 번 돌아본다. 
   “쓸쓸하지? 이 교실. 이제는 임자가 없어진 책상들이 채워져 있기 때문에 더 그래 보이는 것 같아.” 
   “그래.” 
   나는 무심히 대답한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어서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정도도 그때에는 그렇게 힘이 들었다. 
   “마지막이겠구나, 이게.” 
   “응. 아마도.” 
   하지만 괜찮아.. 하고 그는 따뜻하게 웃었다. 
   “어때?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어? 니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 
   “...모르겠어.” 
   그래, 모르겠어. 
   “너에게는 당연할 그 하나가 나한테는 아무래도 보이질 않아. 알고있지? 내가 니 뒤를 쫒으며 너의 생각과 행동들을 지켜보았던 거. 그렇게 함으로써 파악하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를 살아가게 하는 의지의 본질, 나에게는 없는 그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하지만 실패해 버린 것 같아. 방법이 좋지 않았던 걸까?” 
   “서두를 거 없어.” 
   그는 마주 선 채 손을 뻗어 내 어깨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의식처럼 말했다. 
   “마법의 계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는 저주받은 숲을 지나게 될거야. 그건 확실한 아무것도 없고 끝없이 모습을 바꿔가는 음습한 환영이 지배하는 길이야. 너는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서만큼 자신을 의심하게 될거야. 그 마지막에서 너는 스스로를 배신하고, 니 마음이 한가닥 한가닥 만들고있던 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결국 자신의 심장을 찌르게 되겠지. 그렇게 너는 죽을 거야.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을 기억해. 그리고 다시 한 번 되집어 생각해. 너의 그 정의가 과연 -스스로를 찔러 죽일 수도 있을 만큼-절대로 옳은 것인지. 그런 생각이 방해가 돼서 찔러넣는 칼의 방향이 조금 어긋난다면 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을 거야. 너는 망신창이의 몸을 겨우 가눈 체로 숲을 빠져 나오겠지. 거기에 니가 바라는 그것이 놓여져 있을 거야. 하지만 아직은 불분명한 모습을 하고.” 
   그래.... 
   잘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길에 그가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12. 
   “니 소설들 다 읽어봤어. 괜찮더라.” 
   “읽어봤니? 그러지 말지.” 
   몇권인가 낸 적 있는 조악한 단행본들을 떠올리자 부끄러운 생각이 먼저 들어서였다. 
   “그것이 새로운 ‘방법’이니?” 
   “그래... 결국 나도 오래전 그때의 계속에 있을 뿐인건가?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다고 생각해.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진 않지만.” 
   “아까 말해주지 않았었던가? 넌 많이 변했어. 조금 늙기도 했구.” 
   “뭐야. 자기는 않늙은줄 아나보지? 영원히 산다고 해도 그 모양은 분명 좋지 않을걸. 온통 주름살이 쭈글쭈글할거야.” 
   그의 농담에 기분나쁜척 투덜투덜대 본다. 
   “글쎄, 왜일까... 나는 소설을 써. 그걸로써 나에게 나를 설명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그해 가을에 속초로 여행을 다녀왔다. 바닷가에서 만난 그는 변하지 않은 확신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나는 죽지 않을거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가 부러웠지만, 그것으로 스스로를 비참해하지는 않았다. 
   가을 바다는 좋았다. 해가 떠오를때의 바다는 예쁜 금빛으로 물들면서 부서졌다. 나는 신발을 벗어들고 잔잔하게 밀려오는 작은 파도를 걸었다. 쪼르르 뛰어가다 넘어져버리는 누군가의 귀여운 강아지를 쫒아 고개를 돌릴 때, 귓가로는 서늘한 바닷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밤이 되면 멀리서 피리를 부는 사람이 있었다. 파도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그 소박한 평화로움에 귀를 기울일때면, 나는 이 잠깐의 휴식이 조금 더 오래일 수 있기를 바라곤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모래의 벌판으로, 
   그러는 것이 옳고, 나는 피하지 않을 거다. 사실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숲을 지나왔어. 
   -end-